유니온스틸과 협업
서울 을지로에 위치한 동국제강 본사 건물인 페럼타워 3층 전시장. 유난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다. 작품명은 '헥시 벤치/인 액션(hexi bench/in action)'. 언뜻 봐선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앞에서 보면 벤치 같기도, 위에서 내려다 보면 예술작품처럼 보이는데, 소재나 작품형태가 예사롭지 않다.
산업재인 철강재와 예술과의 만남을 대표하는 이 작품은 컬러강판 전문업체인 유니온스틸과 아트가구 디자이너 이현정 작가의 협업(콜라보레이션ㆍcollaboration)을 통해 탄생했다. 이번 협업은 유니온스틸이 컬러강판 브랜드인 럭스틸(LUXTEEL)을 출시하면서 기존 산업재로만 사용되는 컬러강판의 이미지를 깨기 위해 가구공예, 금속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럭스틸 미츠 아트(LUXTEEL MEETS ART)'라는 타이틀로 공동 작업을 하게 된 것.
이 가운데 이현정 작가는 27세의 신진 디자이너로 협업에 참여한 젊은 작가 5명 중에서도 가장 젊은 피다. 유니온스틸은 새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기성 디자이너 보다는 신진 디자이너를 택했다. 산업재와 예술작품의 만남, 새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협업 이라는 상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신진 작가들이 보다 창의적인 방식으로 산업재라는 기존 철강재의 이미지를 깨트리는데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
이 작가는 처음 유니온스틸로부터 협업 제의가 왔을 때 두려움이나 낯설기 보다는 "재미있겠다" 싶었다고 한다. "철강회사라 해서 딱딱한 이미지가 없진 않았지만, 평소에 잘 다루지 못했던 철강재를 내 맘대로 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막상 유니온스틸로부터 작품의 원재료로 사용될 럭스틸 제품을 받아 들고는 깜짝 놀랐다. 기존에도 철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보긴 했으나 완성품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 "작업실에 럭스틸 제품이 왔을 때 코팅 처리까지 한 완성품인 것을 보고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솔직히 난감했어요."
하지만 이 작가는 매끄러운 표면에 과감하게 스크래치를 내는 작업을 해보기로 했다. 망치로 때려보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해봤다. "어릴 적 미술시간처럼 즐겁게 작업하는 느낌으로 작품을 만들어봤어요. 그랬더니 만족할 만한 작품이 나오더라구요."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이런 작업과정을 거쳐서인지 이 작가는 이번 작품의 모티브를 동심에서 가져왔다. 어렴풋이 기억되는 유년 시절 봤던 자연, 재료의 질감이 떠올랐다고 한다. "어릴적 만화경(거울로 된 통에 형형색색의 유리구슬, 종이조각 등등을 넣어 아름다운 무늬를 볼 수 있도록 만든 장치)에서 얻은 영감을 떠올려 럭스틸 재료를 사용했는데, 재료에 제한 받기 보다는 그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고심하다가 표면의 코팅을 그림그리 듯 스크래칭해 질감을 살리는 방식으로 마감했어요."
사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산업재와 예술 간 협업은 흔하지 않다. 오히려 딱딱한 이미지의 산업재와 자유롭고 창의적인 예술 작품은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아트 마켓의 본고장인 미국, 유럽 등에서도 예술가들과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은 활발하지만 철강 등과는 협업사례를 찾기 힘들다. 때문에 이 작가와 유니온스틸의 협업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미 미술명문대학인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학교(일명 리즈디)에서 '파인 아트(Fine Art)'를 전공한 이 작가는 뉴욕에서 무대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쌓은 뒤 아트가구 디자인으로 미래를 정했다고 한다. 아직 생소한 분야이고 다른 예술 보다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선택했다는 것.
이 작가는 유니온스틸과의 협업에 이어 최근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인 펜디(FENDI)와 협업하기도 했다. 이 작가는 나무에 펜디의 가죽을 입혀 한국의 반상기 모양의 스툴(stoolㆍ등받이나 팔걸이가 없는 의자)을 만들었다. 이 작가는 "가구라는 분야가 실제 생활에 사용되는 만큼 실용성이 중요하지만 예술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앞으로의 창작작업에서도 이 점을 유지하며 활발하게 활동할 생각"이라고 다짐했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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