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말 있잖아요. 요 작은 게 우릴 뭉치게 했다니까요."
서울역 맞은편 남산 자락의 마을. 세상 사람들에겐 '동자동 쪽방촌'으로 알려진 용산구 동자동에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신문이 있다. '쪽방신문'이다. 1,000여가구 동자동 쪽방주민 지원센터인'동자동 사랑방'의 엄병천(43) 대표는 "제 한 몸 가누기 힘든 사람들이다 보니 시체에서 냄새가 나야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라며 "소통의 통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신문사 사장'노릇까지 하게 됐다"고 했다.
쪽방신문은 네 쪽짜리 타블로이드형 무료신문. 무료 급식소 소식, 노숙자 지원단체, 일자리 구하는 방법, 계절별 주의사항 등 이곳 쪽방촌 사람들에겐 금쪽같은 정보들로 채워진 생활정보지다. 엄 대표는 "지금은 이웃 쪽방촌 사람들에게까지 입 소문이 퍼져 나오기가 무섭게 다 없어지는 신문이 됐다"며 "작년 말 첫 신문이 나왔을 땐 '이 딴 걸 왜 만드냐'며 찢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격세지감이다"고 했다. 하루 벌어 입에 풀칠하는 이들에겐 신문이라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는 것이다.
인쇄 한 번(1,500부)에 드는 비용은 20만~30만원. 만만치 않은 돈이 들었지만 엄 대표는 멈출 수 없었다. "자잘한 경조사 등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가 실리자 이게 화두가 돼 쪽방촌 사람들 사이에 왕래가 늘더라고요. 무릎을 탁! 쳤죠. 이게 우릴 뭉치게 하는 구나. 뭉치면 우리도 못할 게 없지!"
실제 이 신문 덕분에 동자동 사랑방은 지난 3월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간판도 달았다. 쪽방촌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2,000만원으로 만든 일종의 은행으로 담보 없이 저리 대출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지난 8월에는 '사랑방마을기업 밥이 보약'이라는 식당도 차렸다. "모두 한데 뭉친 덕에 가능했던 일이죠."
지난 2000년까지 충북 제천서 농사를 짓다 상경해 빈민촌에 정착한 엄 대표. 농사 짓던 뚝심으로 기왕 하는 일 더 해보기로 했다. 볼륨이 너무 작고 한 번 읽히고 나면 폐지상자로 들어가는 광고전단지 같은 신문 대신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안내책자를 만들 생각이다. 다행히 국가인원위원회 주최 사업에 응모, 선정되면서 사업비로 1,000만원을 받게 됐다.
엄 대표는 "주변의 생활 인프라가 자세히 소개된 안내책자가 나오면 이 곳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한 단계 향상될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2,000~3,000부 인쇄될 책자는 25일쯤 동자동 쪽방촌 주민과 서울역 주변 노숙인 손에 쥐어질 예정이다.
이정현기자 joh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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