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기슭에 이르는 동네인 서촌은 조선시대 중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서울 종로구 체부동 효자동 통의동 누상동 옥인동 등이 속한 이 지역은 한옥이 많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4월 ‘경복궁 서측 1종 지구단위 계획’을 발표, 서촌의 한옥과 역사성을 보존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7년 재개발이 결정된 옥인 제 1구역은 이 계획에서 빠졌다.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재개발 최종 절차인 관리처분계획 인가만 남겨둔 상태다. 인가가 나면 바로 착공하게 된다.
그러자 이곳의 문화유산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촌주거공간연구회(대표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나섰다. 서촌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지키려는 주민 모임이다. 옥인 1구역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복원해야 한다는 이들의 요청에 서울시는 일단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보류했다.
옥인 1구역은 역사 자원의 보고다. 조선시대 중인 문학의 절정인 옥계시사(玉溪詩社)가 모이던 송석원(松石園) 터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가 쓴 ‘송석원’ 글씨 바위, 가재 김창업의 바위 글씨가 새겨진 가재 우물,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남은 정자 청휘각(晴暉閣) 등이 있던 곳이다.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그린 청휘각은 불에 타서 없어졌고, 가재 우물은 1950년대 주택을 짓는 과정에 묻혔다. 추사의 송석원 각자 바위도 시멘트 축대 속에 덮여 버렸지만, 어느 자리라고 주민들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어 의지만 있다면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친일파 윤덕영의 호화별장인 벽수산장도 여기에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서촌 제일 한옥으로 꼽히는 옥인동 윤씨 가옥 등 10여 채의 한옥과 윤덕영 사위의 집으로 서울시 문화재인 박노수 가옥이 있다.
송석원은 옥계시사의 맹주인 서당 훈장 천수경의 집이다. 시사는 시를 짓는 동호인 모임으로, 옥계라는 이름은 옥인동을 흐르던 옥류동천 계곡에서 나왔다. 옥계시사는 정조 10년인 1786년 규장각 서리들을 중심으로 결성돼 30여년 간 이어졌다.
‘송석원시사’로도 불리는 옥계시사는 조선시대 웃대 중인 문화의 정점이다. 웃대는 청계천 위쪽 동네라는 뜻으로, 지금의 서촌이다. 웃대의 중인들은 역관(통역사), 의관(의사), 율관(변호사), 음양관(천문학자), 산관(수학자), 화원(화가) 등 요즘으로 치면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중인은 양반이 아니어서 고위 관직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전문 지식과 문화적 소양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들어 한양의 문화 리더로 떠오른다.
옥계시사의 아취는 매우 그윽했다. 동인 시집뿐 아니라 김홍도와 김인문의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791년 음력 6월 보름날의 야간 모임을 전하는 글을 보자.
“나무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골짜기는 은은한 달빛에 정취가 그윽하다. 개울엔 아지랑이 홀연히 피어나 여름 밤의 흥취를 한껏 무르익게 한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 건너 뜻이 맞는 아홉 사람이 옥계 옆에 모였다. 모인 자리에 촛불이 켜지고 아담한 술상이 들어온다. 모인 사람들은 가져온 좋은 술에 취하자 더러는 팔 괴고 눕기도 하고 더러는 술기운에 자갈 위를 비틀거린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고 둘러 앉아 흐뭇한 마음으로 옥계의 아름다움을 다투어 노래한다.”
옥계시사의 백일장은 누구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대단한 자리였다. 하얀 종이를 펼치고 글재주를 겨룬다 해서 ‘백전(白戰)’이라 했던 이 행사는 매년 봄과 가을, 좋은 날을 잡아서 했는데, 수백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고 최고의 문장가들이 심사를 맡아 재상들도 백전 심사를 영예로 알았다. 백전이 열릴 때면 전날부터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순라꾼은 한밤중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줬다. 장원을 한 사람의 시축(시를 쓴 두루마리)은 그날로 한양 안에서 돌고 돌아 종이가 다 해져버린 뒤에야 주인에게 돌아올 만큼 인기였다.
당대 한양의 문화 중심으로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 터, 송석원 자리는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다. 추사의 글씨도 이곳의 한 단독주택 마당 석축 안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이 가능해 보이지만, 재개발로 아파트를 지으면 영영 묻히고 만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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