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무 다 떠넘기고 퇴직금 안 주려 '364일' 계약해도 냉가슴만
2년 전 경기의 한 사립고교 역사과 기간제교사로 채용된 최모(33)씨는 합격의 기쁨도 잠시,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는 학교의 편법에 눈물을 삼켰다. 1년의 계약기간이 계약서에는 3월2일부터 다음 해 2월 28일까지가 아니라 2월 27일까지로 적혀 있었던 것. 학교가 1년 이상 근무자에게 지급하는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하루를 빼버린 것이다. 최씨는 채용이 취소될까 두려워 입 한번 벙긋 못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는 "요즘엔 방학 중 급여를 주지 않기 위해 통상 6개월 단위의 계약을 4개월로 단축해 계약기간을 쪼개는 신종수법까지 등장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묻지마 채용에 전형료 장사까지
정교사와 더불어 학교 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간제교사들이 불투명한 채용구조와 부당한 처우에 신음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 사립고교는 예비교사 사이에서 '지독한 채용 과정'으로 악명이 높다. 떡 하니 정교사 채용공고를 내고선 면접을 보러 온 지원자들에게 "먼저 기간제교사로 테스트를 거친 후 결정하겠다"며 예정에도 없던 면접을 4번이나 실시했다. 항의도 해봤지만 "말 잘 듣고 우리 학교와 코드가 맞는 사람을 뽑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설명에 예비교사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채용의 기회가 주어지는 건 행운이다. 서울의 한 사립고교 기간제교사를 지냈던 이모(32ㆍ여)씨는 "재단 친인척 등 인맥이 가장 먼저고 그 다음이 돈이다. 하다못해 전에 일하던 교장한테 추천이라도 받아야 명함을 내밀 수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초짜들은 내정자를 위해 시험 같이 봐주는 들러리 역할만 한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최근엔 "기간제는 3만원, 정교사는 5만원"으로 대놓고 전형료 장사에 나서는 사립학교도 많다.
채용과정이 투명하지 않은 것은 공립학교도 마찬가지지만 사립학교는 더 심하다. 임광빈 서울시교육청 교원정책 사무관은 "사립학교의 경우 법인에게 인사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교육청이 채용과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없다. 시험 비용도 수익자부담원칙이 적용돼 전형료를 제재할 법적 근거도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사립학교들은 정규교원을 채용할 자리가 있어도 해고가 쉽고, 부리기 편하다는 이유로 기간제교사를 '땜질 고용'하고 있다.
각종 횡포에도 말 못하는 '봉'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른 학교로 떠나야 하는 기간제교사들은 학교에서 말 그대로 '봉'이다. 혹시나 정규직 전환을 시켜주지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도 있고, 다른 학교로 옮길 때 알음알음 추천을 해주는 것이 중요해서, 기간제교사는 교장과 동료교사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부당한 요구도 받아들인다.
서울의 한 사립고 기간제교사로 일했던 최모(33)씨는 출산휴가를 신청한 정교사의 공백을 메우려 채용됐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교무지도를 매일 떠맡았고, 교사들 간식 심부름, 컴퓨터 수리까지 해야 했다. 최씨는 "아이들 수업지도에 힘써야 할 똑같은 교산데, 기간제라는 이유만으로 아르바이트생 부리듯 했다"며 자조했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국어과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김모(28ㆍ여)씨는 "교장이 내 덕에 들어왔으니 사례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기간제 교사들한테만 수시로 상납을 요구해 교장 결혼기념일까지 꼬박꼬박 챙겨야 했다"며 억울해 했다. 한 기간제교사는 "교장으로부터 '기간제 교사는 21세기 신(新)노예'라는 말까지 들었다"며 씁쓸해했다.
업무 연속성 떨어져 교육부실 우려
불안정한 신분의 기간제 교사들이 늘어나면서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도 심각하다. 최근 경기교육청이 발표한 행정사무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담임교사가 1년 사이 3차례 이상 교체된 학교가 적지않았다. 경기 안성의 A초등학교 3학년 한 학급의 경우 담임교사의 휴직과 기간제 교사 채용, 학기 중 신규교사 발령 등으로 담임이 4번이나 바뀌었다.
서울의 한 사립고교 학부모 조경애(47)씨는 "사실 기간제교사라고 하면 임용고시를 통과한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전문성이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또 금방 떠나는 교사들이라 업무 연속성도 떨어질 테고 아이 교육상 하나도 좋을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전직 기간제교사는 "기간제교사가 정규교사보다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하고 생각하지 않지만 신분이 불안정하다 보니 아이들한테 전적으로 마음을 쏟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임정훈 전국교직원노조 대변인은 "기간제교사들의 열악한 처우도 문제지만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그 피해가 전가되는 현실이 더 안타깝다"며 "정교사 채용을 늘리는 게 급선무고 학교운영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더라도 기간제교사의 차별을 줄이려는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기간제만 늘리는 정부
전국 교사 중 기간제교사의 비율은 1990년 초등학교 0.2%, 중학교 1.4%, 고교 1%였던 것이 지난해 각각 2.9%, 8.4%, 8.5%까지 치솟았다. 임시직 개념으로 도입된 기간제교사가 이처럼 폭증한 데에는 정부의 암묵적인 장려책이 있었다.
정부는 "출산율 감소로 인한 학생 자연감소분을 고려해야 한다"며 부족한 교원을 신규채용으로 충원하지 않고 있다. 신규임용을 억제하며 2020년까지 기다리다 보면, 교사 1인당 학생수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수준(중등기준 13.6명)에 근접한다는 계산이다.
현재 중등교원은 법정 정원 18만2,400명에 3만6,000명이나 부족한 14만6,530명이다. 전국에 학급당 학생수가 41명을 초과하는 콩나물교실(과밀학급)은 4,948곳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는 교육환경은 고려하지 않고 편법으로 기간제 채용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정부는 6,7년 전까지만 해도 교원수요가 높다며 교육대학, 사범대학을 늘렸기 때문에 이제는 고작 2,500개 중등 정교사 자리를 놓고 약 5만여명의 2급 정교사자격증 취득자가 경쟁하는 상황이다. 전국사범대학생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중등임용시험 경쟁률은 일반사회 79.2대 1, 역사 78.4대 1, 지리 91대 1에 달했고, 지역별 과목별 최고경쟁률을 기록한 경기지역 지리교사 임용 경쟁률은 209대 1까지 치솟았다. 임용에서 탈락한 나머지 인원은 모두 기간제교사 자리에 매달린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수도권이나 광역시 등 상대적으로 교육여건이 좋은 학교는 계속 과밀학급일 수밖에 없는데, 전국 평균 학생수를 놓고 10년 뒤 학급당 학생수가 20명 이하로 줄어든다는 것은 수치의 함정에 빠진 계산"이라고 정부 논리의 허점을 지적했다.
교과 전담제, 수석교사제 등의 교육여건 개선정책을 위해서는 교과교실제 1만5,000여명, 수석교사제 5,000여명 등(한국교육개발원 추산) 상당수 교원이 충원돼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 역시 3월 "학생 수가 줄면 교과교사 수요는 줄겠지만 교과교실제 도입 등에 따라 교사를 증원할 필요가 있다"며 "중장기 교원수급계획을 새로 세우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교원 증원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는 증원에 부정적이다.
정부가 기간제교사를 양산하고 관리감독에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피해는 기간제교사와 학생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김혜영기자 sih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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