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역사교과서 검정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5ㆍ18민주화운동, 6월 항쟁, 친일파 청산 노력 등의 역사적 사실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하는 내용의 세부 검정기준을 확정했다. 앞서 8일 발표한 개정 교과서 집필기준에 이 같은 내용이 빠졌다는 비난이 일자 세부 검정기준을 앞당겨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학계의견을 수렴했다기엔 한심한 '꼼수'와 심각한 '무리수'가 담긴 교육당국의 대응이다.
교과서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는 3가지를 지켜야 한다. ▲헌법에 해당하는 '교육과정' ▲교육과정에 근거해 교과서 서술지침을 제시한 '집필기준' ▲이를 준수했는지 평가하는 '검정 기준'이 그것이다.
5ㆍ18민주화운동 등이 빠졌다는 정치권과 역사학계의 비판이 거세지자 교과부가 내세운 것은 대강화(大綱化) 원칙이었다. 집필기준에서 세세한 내용까지 규정하면 집필자의 자율성을 구속할 우려가 있어 구체적 사건을 나열하지 않고 큰 틀만 제시했다는 것이다. 원칙 자체는 역사학계도 공감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원칙이 정부의 입맛에 맞게끔 선택적으로 적용된 것이 문제다. 집필기준 현대사 부분에선 '민주화 운동'으로 뭉뚱그려 표현했지만 근대사 부분에는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구체적 사건이 명시돼 있다. 교육과정의 핵심 쟁점이었던 '자유민주주의' 용어도 사실 '민주주의' 개념이 더 포괄적이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란 표현을 박아넣은 것도 대강화와는 거리가 멀다.
교육당국 스스로 원칙이 없으니 절차상 문제도 심각하다. 검정기준은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을 준수하였는가'를 따지는 것인데 집필기준에도 없는 내용을 세부 검정기준에 넣어 이를 지키지 않으면 검정 통과가 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도 교과부 장관이 고시한 집필기준에 없는 내용도 세부 검정기준에 슬쩍 끼워 넣으면 얼마든지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대강화 원칙을 내세워 변명하지 말고 집필기준을 고치면 될 걸"이라며 혀를 차는 소리가 괜한 트집잡기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역사교과서의 첫 단추를 잘못 꿰는 바람에 계속 단추가 잘못 꿰지고 있는 것이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은 "역사적 사실, 헌법 정신과 함께 교육적 측면을 고려해 집필기준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교과부 스스로 내세운 원칙조차 지키지 않은 교과서로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적 측면'을 기대하겠다는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