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유럽에 생긴 직업인 '샤큐터리(Charcuterie)'는 육류를 먹기 좋게 가공ㆍ요리하는 일을 한다. 생고기를 관리ㆍ보관하는 전문가는 '부처(butcher)'라고 부른다. 공장에서 햄이나 소시지 등이 대량생산되기 전, 육류를 절이거나 훈제하고 파테(Pateㆍ고기와 간을 갈아 반죽한 뒤 익힌 요리)와 테린(Terrineㆍ곱게 간 고기를 그릇에 담아 단단히 다진 뒤 차게 식혀서 얇게 썰어 먹는 전채요리) 등을 만드는 일은 순전히 샤큐터리의 몫이었다. 파테는 빵에 잼처럼 부드럽게 발라 먹는다. 테린은 그대로 먹어도 되지만 샌드위치 안에 넣어 먹어도 괜찮다.
40여 년간 샤큐터리 마스터로 활동해온 베니토 플라샤트(61)가 그랜드 하얏트 서울 초청으로 방한했다. 가업을 잇기 위해 10대 중반 유럽 최고의 부처 스쿨을 졸업한 그는 당시 네덜란드의 최연소 부처 마스터였다. 이후 육류를 가공하는 샤큐터리로 전환해 의욕적으로 육류 가공 레시피를 개발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띠를 모자에 두른 플라샤트는 호리호리한 몸매와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16년 전에 이어 두 번째 방한인 그는 유럽에서 한국의 양념갈비 인기가 대단하다는 소식부터 전했다.
"한식은 유럽에서나 한국에서나 맛이 다르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죠. 중국 음식은 완전히 다른 요리 같지만 한식은 고유의 맛이 살아 있어요. 저도 좋아하는 양념갈비는 유럽 사람들이 특히 즐겨 먹습니다."
어떤 이들은 건강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은 공장식 축산업에 반대하며 채식주의자로 돌아섰다. 여기에 공장에서 육류가공품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샤큐터리도 하향길에 접어들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지만 벨기에에서 30년 이상 살아온 그는 매년 벨기에 직업학교에서 졸업하는 부처 마스터와 샤큐터리 마스터가 6명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25년간 벨기에 겐트에서 운영하던 샤큐터리 가게를 접고 1998년부터 샤큐터리 교육에 뛰어든 이유다. 주로 여름에는 포르투갈에 있는 자신의 쿠킹 스쿨에서, 겨울에는 태국에서 호텔 셰프들에게 트레이닝과 컨설팅을 한다.
"육류 섭취 자체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람 건강에 문제가 되는 것은 공장식 축산과 공장의 가공 육류 제품이지요. 학대 받지 않은 육류로 제대로 조리하면 오히려 건강에 좋습니다. 요리할 때 보면 방목한 동물은 근육량뿐 아니라 색부터 다르죠. 진하고 선명해서 소시지로 만들어도 선명한 빨간색이 됩니다. 공장에서 만드는 가공 육류 제품에는 오리 대신 돼지를 넣거나 고기 대신 뼈만 갈아 넣는 경우도 허다해요. 그런 음식에서 무슨 영양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학대 받으며 죽은 동물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그는 동물학대방지협회 회원이라고 했다.
정통 레시피를 지키는 한편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새로운 요리법을 의욕적으로 개발한다는 그는 현재 600여 개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다. 벨기에에 사는 것이 다양한 조리법 개발에 도움이 됐다. "매우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주변국과 교류가 잦아요. 요리도 마찬가지여서 다양한 레시피가 흡수될 수 있었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파테. 프랑스와 벨기에의 가정식으로 점심과 저녁 때 주로 먹는다. 프랑스에서는 오븐에 굽고, 벨기에에서는 스팀통에 쪄 먹는 것만 다르다. 플라샤트는 두 나라의 방식을 혼용한다.
"파테에는 항상 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건강에도 좋아요. 특히 돼지 간에는 비타민과 단백질, 철분이 풍부해서 유럽의 아이들은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씩 튀긴 간 요리를 먹지요. 무엇보다 제가 파테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재료와 섞어 만들어 변신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일과 채소, 허브 등을 파테에 혼합해 계절의 풍미를 살려낸다. 봄에는 신선한 채소, 여름에는 제철 과일, 가을에는 견과류나 마롱(마로니에 열매)이 들어간 파테를 만든다. 토마토를 넣은 파테 위에 토마토를 장식한다든가, 그린 페스토(바질·마늘·파머산 치즈·올리브오일 등을 섞어 만든 소스)를 넣은 파테에는 그린 색 허브를 장식하는 식으로 시각적인 부분까지 살린다.
재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조리법. 슬로우 쿠킹은 영양 파괴를 줄여준다고 알려져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그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슬로우 쿠킹의 하나인 저온 조리법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68도 이하로는 온도를 낮추지 않는다. 육류 속의 세균과 박테리아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오븐에서 고기를 구울 때는 중앙 부분 온도가 68도인지 중간 중간 체크해야 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굽는 것은 맛을 좋게 하기 위해서죠. 그래야 양파나 과일 등의 향이 고기 속 깊숙이 배어들거든요. 덕분에 건강한 음식도 만들게 된 거죠."
그의 아내 나디아는 김치 마니아다. 16년 전 한국에서 김치를 처음 맛보고 반했다. 그녀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는 그는 내년 여름에는 김치 테린에 도전해보겠다고 했다. 그들이 여름을 지내는 포르투갈의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페스토를 넣는 테린이 있는데 페스토 대신 김치 양념을 넣어볼까 해요. 치킨과 김치 양념을 넣고, 겉은 김치로 감쌀 수 있겠지요. 처음 하는 도전이지만 아내와 포르투갈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저도 궁금하네요."
이번에는 김치 테린을 먹을 수 없지만 그가 한국에 와서 만든 라벤더 햄, 토마토 파테, 블루베리와 와인으로 맛을 낸 칠면조 테린, 살라미 등을 20일까지 그랜드 하얏트 서울 델리에서 구입할 수 있다. 가격은 100g당 3,000원 대부터 1만원 대까지.
■ 홈메이드 파머스 파테(Farmer's Pate) 레시피
*1852년부터 내려오는 정통 레시피
▲재료 (1kg의 파테)
다진 돼지고기 0.7kg (목 부위가 가장 좋다), 돼지고기 간 0.3kg, 소금 15g, 후추 2g, 넛메그(Nutmegㆍ 달콤하고 독특한 향을 내는 향신료)가루 1g, 구운 양파 0.3kg (양파를 썰어 후라이팬에 살짝 익힌다), 계란 3개, 빵 0.2kg, 오븐용 온도계
▲만드는 법
1. 3시간 전, 믹싱볼에 달걀을 풀어 빵을 적셔둔다.
2. 달걀 적신 빵을 적당량으로 나눠 가정용 믹서기에 돌린다.
3. 돼지 간을 믹서로 갈아 놓는다.
4. 믹싱볼에 모든 재료(소금, 후추, 넛메그, 구운 양파 포함)를 넣어 잘 섞는다.
5. 오븐용 그릇에 담고, 예열 없이 170도로 맞춘 오븐에 굽는다.
6. 굽는 동안 파테 중앙의 온도를 오븐용 온도계로 체크해 68도가 될 때까지 굽는다.
7. 오븐에서 꺼내 빠르게 식히는 것이 중요하다. 얼음주머니를 그릇 아래 깔아 식히면 된다.
8. 바게트 빵에 발라 먹거나 샐러드와 함께 먹으면 좋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