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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8) 영화 '왕의 남자'의 유명산 설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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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8) 영화 '왕의 남자'의 유명산 설매재

입력
2011.11.1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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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사람·땅이 하나된 지점… '징헌놈의 삶'들은 생과 사를 넘나들고

완만하게 이어지던 경사가 갑자기 각도를 높였다. 사륜구동으로 기어를 변환하자 차는 거칠게 몸을 떨며 산길을 올랐다. 차 한대 지나갈 좁은 임도(林道)가 이어졌다. 비에 파이고 사람들 발과 차 바퀴로 단단히 굳어진 길을 따라 차는 온 몸을 상하좌우로 흔들며 10분을 달렸다. 시야가 트였다. 왼쪽으로 희끄무레하게 남한강이 내려다 보였다. 소리 없는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위로 자애로운 늦가을 햇살이 내려앉았다. 경기 양평군 율천면, 눈이 쏟아져도 매화가 핀다는 유명산의 설매재는 그렇게 정갈한 자태로 불청객을 맞았다.

차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곳에 다다랐다. 걸어서 고개를 향했다. 억새와 풀들과 키 작은 잡목들 사이로 소나무 일곱 그루가 가지를 맞대고 있었다. '왕의 남자'의 두 주인공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이 장인놀이를 하며 서로의 정을 확인했던 곳이다.

"여기서 나무를 꺾어 배우들에게 장인놀이를 시켰지. '왕의 남자' 촬영 이후 6년 만에 처음 와 보네. 도시생활을 하다 보면 시간에 쫓기고 시간에 끌려가는데 이곳에 오면 시간을 잊는다. 공간만 느낄 수 있다. 시간을 초월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곳이다." 이준익 감독은 감회에 젖어 들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밥만 나오면 뭐든지 다 팔아?" 불콰한 얼굴의 중늙은이 양반이 꼭두쇠에게 말을 넣어 공길를 불러내가자 장생은 분통을 터트린다. 이어지는 꼭두쇠와의 갈등과 살인. 장생과 공길은 앞만 보고 도망치다 설매재에 이른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남사당패를 벗어났다는 해방감, 앞으로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불안감 등이 자연의 품 속에서 뒤섞인다.

천민으로 자신을 잊으며 살아야 했던 두 광대는 자연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아감을 맛본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장생) "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눈을 감고 엇갈리던 두 사람은 와락 서로를 껴안는다. 새로운 삶을 함께하겠다는 두 사람의 각오가 배어 나오는 장면. "한양 가자. 한양에서 제일 큰 판을 벌이는 거야." 장생의 제안에 공길은 흔쾌히 몸을 움직인다.

"'왕의 남자'는 궁궐 장면이 너무 많아서 좀 더 시원한 자연경관이 필요했다. 공길과 장생이 느끼는 해방감과 불안감이 화면 안에서 정서적으로 전달되려면 아무래도 스카이라인이 보여야 했다. 땅과 하늘이 한 화면 안에 분할이 되고 그 안에서 둘이 장인놀이를 하며 존재의 확인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소나무 있는 곳에선 하늘과 땅과 너와 나밖에 없다. 그래서 최적지라고 생각했다."(이준익 감독)

설매재에서 인물들은 감정의 분수령을 맞고, 이야기는 변곡점에 이른다. 남사당패에 소속된 천민에서 자유분방한 광대로 새로운 정체성을 찾은 장길과 공생은 한양에서 연산(정진영)과 장녹수(강성연)를 희롱하는 마당놀이로 민초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세상의 꼭대기인 궁궐에 들어가 왕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기름진 음식과 황송한 감투에 눈이 멀고, 고독한 군주인 연산에 연민을 느낀 공길은 "조금만 더"를 말한다. 최고 권력자에게 연인을 뺏길 수 있다는 불안감에 장생이 궁을 떠나자 요구하며 두 사람의 감정은 처음으로 맞부딪친다. 설매재에서의 순정한 사랑이 있었기에 화려한 궁궐 안에서의 감정 대립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 어느 장면보다 이 감독은 로케이션에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세 곳의 후보지 중에서 스태프들이 가장 좋다고 추천한 이곳에 오자마자 이 감독은 바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고작 두 장면 촬영을 위해 거친 임도를 걷고, 무거운 촬영장비를 일일이 어깨에 걸머지고 이동해야 했으니 100명 가량의 스태프들 입이 나올 수밖에. 막상 고개에 도착하자 스태프들은 신이 났다. "김밥을 먹으며 마치 소풍 나온 아이처럼 깔깔거리며 기분 좋게 촬영을 했다"고 이 감독은 회고한다.

"여긴 로미오가 줄리엣을 위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던 발코니 같은 공간이다. 자연 속에 인간 둘이 있으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카우보이가 뉴욕에 있었다면 그렇게 서로 사랑할 일이 없었을 거다. 서로 경쟁을 했을 것이다. 광활한 자연에 두 남자가 있다 보니 사랑을 한 거다. 동성끼리 있으면 동성애가 생기고, 이성끼리 있으면 이성애가 생길 만한 곳이 설매재다."

구중궁궐과는 너무 다른 그들만의 궁궐

궁궐은 중신들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도 권력투쟁이 스며 있는 공간이지?정작 세상과는 단절된 곳이다. 왕은 자신의 어미가 죽은 이 폐쇄공간에서 쾌락을 탐닉하고, 가공되지 않은 삶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세상을 지배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신하들, 죽은 선왕의 영향력 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녹수의 치마폭에 싸인 연산은 죽은 어미를 위한 복수와 진정한 권력 쟁취를 위한 반격을 꿈꾼다.

반면 설매재는 권력과는 무관한,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삶이 돌아가는 원리를 몸으로 터득했으나 터럭만한 권력조차 누릴 수 없었던 두 인생이 절정의 행복감을 느끼는 공간이 설매재다. 언제든 하늘을 지붕 삼을 수 있는 광대들에겐 이상향 같은 이 자연 공간은 연산이 거주하는 인공적인 공간 구중궁궐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상반된 공간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둔 만인지상의 군주와 바닥 인생들은 예정된 죽음의 파국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 연산은 날것의 행동과 거침없는 입담으로 살아가는 광대들을 복수의 지렛대로 삼으려 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된 광대들은 자신들 존재의 근거인 희극성까지 빼앗기게 된다. 연산과 공길은 잠든 채 흘린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림자 놀이로 감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둘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은 결국 비극이니까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희극적으로 살아라. 그게 바로 광대의 정신이다. 광대가 살아있는 동안에 희극성이 제거되면 세상은 뒤틀리게 된다. 살인이 일어나고, 반목이 생기고 쿠데타 같은 전복의 역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궁궐과 대구(對句)를 이루는 상징적인 공간인 설매재에서의 촬영에 난감을 표시하는 스태프도 있었다. "연극적인 대사와 상황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소화할 것이냐는 고민도 많이 했다"고 이 감독은 말했다. 장인놀이에 대한 반대도 적지 않았고, 망설임도 있었다. 드라마 전개상 없어도 되는 장면인데 예술 지향적으로 비쳐 상업적으로 불리할 수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어색해하고 낯설어하는 배우들을 다독여 촬영을 했으나 이 감독조차 관객의 공감에 대해선 확신이 없었다. 이 감독은 "결과적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게 돼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에이, 나도 없고 너도 없어"

장생과 공길의 장인놀이는 영화의 대미와 수미상관으로 이어진다. 장생과 공길이 궁중암투에 휘말려 하나 둘 목숨을 잃어가는 동료 광대들과 신명 난 풍물놀이를 하며 설매재를 넘어가는 장면이다. 장생과 공길이 꿈꾸었던 삶의 판타지이고, 굴곡진 삶을 끝내고 황천으로 향하는 광대들의 모습에 대한 은유이다. 설매재에서 즐거웠던 한때를 보냈던 장생과 공길이 다른 광대들과 어깨를 덩실거리는 장면은 앞부분 장인놀이와 접목되며 감정의 공명을 일으킨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냐."(장생), "아니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공길), "아 여기들 다 있어!"(육갑), "에이, 나도 없고 너도 없어."(칠득) 풍물소리 사이로 들리는 대화들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게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설매재에서 처음 정체성을 자각하고 자아를 체감할 수 있었던 광대들은 다시 설매재로 돌아와 존재의 망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알 수 없는 미지의 곳으로 떠나 희로애락을 다 겪고 먼 길을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떠날 때의 나와 돌아올 때의 나는 같은 나가 아니다. 그게 서사의 기본 맥락이다. 설매재를 거쳐 한양으로 향했던 장생과 공길은 왕 앞에서 줄타기를 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떠났던 길로 다시 오게 된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 바로 전 눈이 먼 장생과 공길이 반군의 함성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생애 마지막 줄타기를 한다. 하늘로 비상하는 두 사람은 설매재로 향하는 듯하다. 줄 위의 인생을 줄 위에서 마치는 장생의 한마디는 오래도록 마음을 울린다. "그래 징헌 놈의 이 세상, 한 판 신나게 놀고 가면 그뿐. 광대로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 제대로 한번 맞춰보자." 큰 판 제대로 벌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서러운 인생들의 한바탕 몸짓은 그렇게 관객들의 눈물을 부른다.

양평=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 43억 제작비로 관객 1000만 불러

43억원. '왕의 남자'의 제작비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기준인 10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이다. 2005년 개봉 당시에도 '왕의 남자'의 예기치 않은 흥행몰이는 화제를 모았는데 되돌아보면 그 성과가 더욱 놀랍다.

한국영화 중 1,000만 고지를 넘어선 영화는 다섯 편이다. '왕의 남자'를 제외하고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 '괴물' '해운대'는 모두 제작비 100억원을 넘는 블록버스터였다. 덩치 큰 영화는 바람몰이도 쉽고, 해당 투자배급사들의 적극적인 마케팅 지원이 있기에 흥행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43억원짜리 중급영화에 불과했지만 '왕의 남자'는 1,230만 관객을 동원했다. '괴물'에 이어 한국영화로는 역대 2위의 흥행기록이다. "당시 빚에 너무 시달려 빚 갚는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는 이준익 감독으로서는 전혀 예상도 못했던 수치다.

'왕의 남자'는 개봉 초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태풍'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킹콩'의 틈바구니 속에서 개봉관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일명 '왕남 폐인'이 등장하면서 '왕의 남자'는 뒷심을 받았다. 개봉 초기보다 뒤로 갈수록 관객이 더 늘어나면서 예상 밖 흥행 성적을 올렸다.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에 감정을 이입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영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흥행에 힘을 보태게 된 것이다. 사극으로선 파격적으로 동성애를 끌어안으면서 화제를 몰았고, 공길 역의 이준기를 새로운 별로 탄생시키며 젊은 관객을 유인했다.

이 감독은 "그때는 영화에 대한 해석들이 굉장히 자유분방했다. 문화적 다양성이 늘어나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분석했다. '왕의 남자'는 영화를 두고 관객들 사이에서 갖가지 담론과 분석이 쏟아졌던 드문 사례로 꼽힌다.

'왕의 남자' 개봉한지 6년이 지난 지금, 문화적 현실에 대한 이 감독의 시각은 비판적이다. 다양한 해석을 서로 공유하던 이전과 달리 "요즘은 네티즌 사이에 (생각의) 강요만 있고, 경제적 가치에 따른 평가만 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후진국은 군인이 권력을 잡고, 중진국은 재벌이 권력을 잡는다"며 "선진국은 문화인이 권력을 잡는데 우린 선진국으로 가려다 후퇴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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