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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어플루엔자에 감염되다/ (하) 연애도 육아도 돈, 돈,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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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어플루엔자에 감염되다/ (하) 연애도 육아도 돈, 돈, 돈

입력
2011.11.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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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급호텔 웨딩·200만원대 유모차… "남보다 더…" 호화病, 고질병 됐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주부 A씨는 최근 초등학생 자녀의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고 고민에 빠졌다. 장소가 특급호텔 뷔페였기 때문. 엄마들도 동행하는 자리라 선물은 얼마짜리를 해야 하는지, 뭘 입고 가야 할지 신경이 쓰였다. "아이랑 제 밥값만 해도 꽤 될 텐데 평소처럼 5,000원짜리 선물을 들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애 생일에 큰 돈 쓰기도 그렇고…."

고민 끝에 3만원짜리 선물을 챙겨간 A씨는 "어쩌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본인들은 여유가 있어 하겠지만 그런 초대는 다시 안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육아도 명품 경쟁… 엄마들은 죽을 맛

패션 소비재에 국한됐던 명품 열풍이 최근 몇 년 새 라이프 스타일 전반으로 무섭게 번지고 있다. 결혼식은 특급호텔, 웨딩드레스는 해외 디자이너 제품, 여행은 해외여행, 유아교육마저 월 100만원을 훌쩍 넘는 영어유치원과 놀이학교가 대세인 양 시장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 중 명품 경쟁이 가장 뜨거운 분야는 육아. 저출산 기조와 맞물려 고급 유모차와 고가 브랜드의 옷, 영어유치원 정도는 해줘야 부모 노릇 제대로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반면 이를 좇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시달리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육아 어플루엔자의 확산은 유모차의 유행 추이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지금 여덟 살인 첫 애를 키울 때는 대부분 아가방 유모차를 썼고, 좀 좋은 거 쓴다는 사람들이 맥클라렌 같은 해외 제품을 찾았어요. 4년 뒤 둘째를 낳고 보니 맥클라렌은 국민 유모차가 돼 있었고, 요즘은 200만원에 육박하는 스토케가 대세라네요." 주부 서모(37ㆍ서울 대치동)씨는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가끔 우리 아이들만 너무 해주는 게 없나 싶어 속상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강남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관악구 봉천동의 주부 최모(31)씨는 조만간 어린이집에 보낼 두 돌 아들을 위해 미국 출장 가는 시누이에게 폴로 유아복을 몇 벌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 옷차림에 따라 선생님이나 다른 엄마들의 대접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들만큼은…"으로 시작된 은근한 경쟁 심리는 어느새 "더 좋은 것을…"로 발전한다. 여기에 사교육 붐까지 더해져 양육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올 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조사한 자녀 1인당 21세까지 총 양육비용은 무려 2억6,204만원. 아이 하나 키우는데 매년 1,250만원씩 든다니, 출산 기피는 불가피한 귀결이다. 딸 하나를 둔 출판 디자이너 양모(34)씨는 "하나만 낳더라도 남들 하는 건 다 해주며 제대로 키우고 싶지 궁핍하게 둘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며 "어차피 돈이 아이를 키우는 세상 아니냐"고 반문했다.

연애ㆍ결혼에도 냉혹한 현실주의 바람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연애ㆍ결혼 풍속도도 바꿔놓고 있다. 남성들은 배우자의 제1 조건으로 맞벌이를 꼽고, 경제력이 연애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데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한다. 올 봄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미혼 직장인 64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맞벌이를 원하는 남성은 88.6%로 여성 82%보다 많았다. '가계에 도움이 돼야 하므로"(72.2%)가 첫째 이유였다.

결혼 5년차인 직장인 박모(37)씨는 지난해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려는 아내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는 "씀씀이를 줄이면 혼자 벌어도 살 수야 있겠지만 솔직히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여유로운 휴가, 이런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가 힘들다"고 했다. "엄마 품에서 못 크는 아이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애들이라고 맨날 싸구려 티셔츠만 입고 살면 행복하겠어요?"

중소 의류업체 직원 김모(32)씨는 올 봄 6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여자친구가 바라는 소비 수준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념일마다 명품 선물을 받고 싶어했어요. 처음에는 코치 토트백, 그 다음에는 루이뷔통 지갑, 구찌 쇼퍼백, 점점 액수도 커졌죠. 마치 그걸 해 주고 못 해주고가 사랑의 증거인양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는데, 평생 그걸 충족시켜주며 살 엄두가 안 나더군요." 그는 "남녀평등 외치며 악착같이 공부하던 여자들도 왜 연애 결혼 앞에선 그렇게 쉽게 물질만능주의에 빠지는지 모르겠다"며 "요즘 젊은 남자 치고 여자친구 명품 선물 때문에 고민 안 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지상주의라는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여성들의 양성평등 요구도, 남성들의 가부장적 욕구도 힘을 잃고 만다. 어플루엔자가 창궐한 한국사회에서 사랑과 낭만은 사어(死語)가 되어가고 있다.

●어플루엔자 (Affluenza)

사치병, 소비중독 바이러스. 풍요를 뜻하는 어플루언트(affluent)에 유행성 독감 인플루엔자(influenza)를 더해 만든 합성어.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현대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질병을 말한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해외브랜드를 명품 착각…"사치품·고가품으로 불러야"

"명품이 아니라 사치품 내지 해외 브랜드로 써달라." 원대연 한국패션협회 회장은 얼마 전 기자간담회에서 값비싼 해외 브랜드가 명품으로 둔갑한 데는 언론의 역할이 작지 않다며 기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명품(名品)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혹은 작품'이다. 영어로는 'Well-made Product'. 고가 브랜드 상품을 우리처럼 거리낌없이 명품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거의 없다. 영어로는 'Luxury Goods' 혹은 'Premium Product', 즉 사치품이나 고가품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명품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20여년 전부터. 1990년 9월 갤러리아 백화점이 의류전문점 파르코(현 갤러리아명품관 EAST)를 재개장하면서 '명품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곳에 진열된 해외 브랜드를 중심으로 명품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된 것이다.

명품이란 용어의 후광효과는 대단하다. 그렇게 불리는 고가의 해외 브랜드는 당연히 고급 소재로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외 고가 브랜드는 유럽 장인의 공방이 아닌 중국 등지의 공장에서 생산된다. 여느 기업처럼 인건비 등을 줄여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원가 절감을 위해 과거보다 질 낮은 소재를 쓰기도 한다.

어느 브랜드는 같은 제품을 유럽과 중국의 공장에서 동시에 생산한다. 포장을 뜯어 속을 보기 전까진 'made in France'인지 'made in China'인지 알 수 없다. 말 그대로 복불복이다.

명품 소비 열풍으로 대표되는 어플루엔자 치유는, 고가 브랜드에 명품이 아닌 사치품 혹은 고가품이란 제 이름을 찾아주는 데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인선 기자 kelly@hk.co.kr

■ 전문가들 "예방백신 필요할 지경… 내적가치 중시 풍토 필요"

과시욕은 인간의 기본 욕구라지만, 최근의 과도한 명품 소비 열풍은 사회병리 현상이라 할 만하다. 이를 예방하기 위한 어플루엔자 백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온라인 중심의 관계 맺기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복원하는 작업이 먼저라고 말한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공동체가 무너지고 시장주의만 남은 현실에서 사람들이 계급질서를 드러내는 소비 행위를 통해 일종의 소속감을 느껴온 것"이라며 "명품을 구입하며 적어도 중산층 아래로는 추락하지 않았다고 자위할 게 아니라 구성원들이 서로 돌보고 좋은 기운을 북돋워주는 사회를 새로 꾸려야 한다"고 말했다.

소비의 평준화로 명품 소비를 통한 '부의 구별짓기'가 어려워진 만큼 대중 스스로 자의식 회복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김혜남 인천나누리병원 소장은 "이미 다수가 갖게 된 명품은 과시욕보다는 그 집단에 소속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소비의 동기가 된다"며 "명품 구입 유혹을 느낄 때 혹시 자신감 부족을 고가품을 통해 상쇄하려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는 "무엇을 입고 쓰는가로 사람의 내면까지 평가하는 세태가 변하지 않으면 명품 집착은 사라지기 어렵다"며 "물질이 아닌 문화적 포용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각자가 자의식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의 어플루엔자 확산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어서 개개인의 변화만으로는 막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사회가 성장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경쟁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명품의 효용성에 주목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김상훈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신규 채용이 줄면서 사회 전반의 경쟁이 유례없이 치열해진 만큼 명품 구입은 투자 대비 수익률이 높은 경쟁력 강화 수단이자 하나의 합리적 구매 행위가 되고 있다"며 "단순히 개인에게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외모를 포함한 스펙이 아닌 다른 내적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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