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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장편 '희랍어 시간' 낸 한강/ "언어앓이의 괴로움…아예 소설로서 부딪혀보자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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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장편 '희랍어 시간' 낸 한강/ "언어앓이의 괴로움…아예 소설로서 부딪혀보자 생각했어요"

입력
2011.11.1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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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41)씨에게 전화를 걸자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음악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Sound of silence)'. 그의 신작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발행)의 여주인공은 말을 잃고 침묵에 잠긴 여성이다. 한씨는 "(소설과 무관하게) 원래 좋아하는 음악"이라며 웃었지만, 소설 속 여주인공이 말을 잃은 설정엔 작가 자신의 고민이 깔려 있다. "어느 순간 내가 쓴 문장 자체가 너무 싫어져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어요. 머리 속에 어떤 단어를 떠올려도 견딜 수 없었어요. 진실인 것 같지 않고. 언어에 매력을 느껴 시작한 일인데, 그 언어가 왜 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지…. 이 고민을 아예 소설로써 부딪쳐 보자고 생각했어요."

지난해 3월 출간한 <바람이 분다, 가라> 를 쓰던 당시 겪은 이 언어앓이의 괴로움이 '침묵의 소리'가 빚어지는 언어 이전의 세계로 나아가게 했다. 소설 <희랍어 시간> 은 눈이 멀어가는 남자도 등장시켜 소리와 빛이 소멸하는 세계를 더듬어간다. 소리와 빛을 삼켜버린 흑점 같은 세계는 그러나 부글거리는 태양을 잉태하는 곳. 소멸이라기보다 부활을 위해 기원으로 거슬러 가는 셈이다. 추천사를 쓴 문학평론가 이소연씨는 "(소설은) 언어가 몸을 갖추기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흔적, 이미지, 감촉, 정념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며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과 탄생이 새로운 몸을 얻어 환생하는, 세속의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고 평했다. 소설은 그야말로 그 소멸의 끝에서 꿈틀대는 탄생, 양수에 잠긴 태아의 잠영(潛泳)같은 이미지를 찬란하면서도 애잔하게 환기시킨다.

소설의 한 축인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원래 어린 시절 '숲'이란 우리말에서 탑 모양을 떠올리며 우리말에 매료됐다. 그러나 열일곱 살 때 한번 말을 잃어버렸고 20년 뒤 다시 말을 잃는다. 이혼 후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까지 뺏긴 것이 직접적 계기인데, 심리치료사의 의례적 상담에 그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라고 글로써 답한다. 또 다른 축인 '빛을 잃은 남자'는 열 다섯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을 가 희랍철학을 공부하나 유전병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을 것이란 진단을 받은 뒤 홀로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 강사를 한다.

두 남녀가 만나는 곳이 희랍어 수업 시간이다. 두 남녀의 과거 회상이 교차해 진행되는 소설은 어느 날 남자가 안경이 깨져 어둠 속을 헤매다 여자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은 뒤 둘이 하룻밤을 같이 보내며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다.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문장으로 고요하게 흐르던 소설은 이 장면에서 슬픔의 관능성으로 고양되고, 마침내 여자가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끝을 맺는다.

여자가 말을 잃은 것, 혹은 작가 자신이 글쓰기에 괴로워했던 배경은 소설 속 이런 구절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165쪽) 너덜너덜해진 언어의 무의미한 공회전으로 말이 소음 공해와 다를 바 없어진 시대적 요인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작가 역시도 "언어라는 게 자아와 세계의 긴장 속에서 나오는 떨림 같은 게 아닐까 하는데, 세계가 너덜너덜해지고 자아도 너덜너덜해지고 그 사이의 언어조차 너덜너덜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1993년 등단해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등을 내며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한 작가는 다시금 상처 받은 이들의 흐릿한 숨결을 문장 마스터의 솜씨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조용호기자 you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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