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자리를 이양한지 어느덧 1년5개월이 지났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ㆍ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권력 무상을 가리킴)이라고 하지만 랭킹 2위는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2인자 자리를 보전하는 것도 힘이 부쳤다. '젊은 피'들은 거침이 없었다. 저들의 기세 등등함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3위→4위로 밀려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등 뒤에서 수군거렸다.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며 "너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그렇다고 속절없이 뒷걸음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 나이 이제 30세. 황혼의 퇴임식을 치르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이야기다. 페더러가 남자프로테니스 BNP 파리바 마스터스(ATP 1000시리즈)대회에서 첫 우승컵을 따냈다. 페더러는 4대 메이저대회 챔피언 트로피만 16개를 안았지만 유독 이 대회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페더러는 1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단식 결승에서 프랑스의 조 윌프리드 총가(26ㆍ랭킹7위)를 2-0(6-1 7-6)으로 따돌렸다. 지난해 8월 ATP 1000 신시내티 오픈을 차지한 이후 페더러는 14개월 만에 18번째 마스터스 대회 정상에 올라, 라파엘 나달(24ㆍ스페인)이 보유한 19개 타이틀에 1개차로 따라붙었다. ATP 1000 마스터스는 메이저대회 바로 아래 등급으로 총상금 규모가 40억원대에 이른다.
페더러는 2003년 윔블던을 통해 메이저대회 첫 챔피언에 올랐다. 지난해까지 8년 연속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메이저 대회 우승컵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지만 올시즌 처음으로 메이저 타이틀을 손에 넣지 못했다. 하지만 페더러는 하락세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초반부터 강하게 총가를 밀어붙여 30분만에 첫 세트를 따냈다.
페더러는 우승직후 "두 살배기 쌍둥이 딸이 새벽 4시에 깨는 바람에 잠을 설쳤지만 경기를 잘 치러 나 자신이 놀랄 정도"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플레이가 잘 됐다"고 기뻐했다. 페더러는 또 "올해 힘든 패배를 몇 차례 겪었지만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보이려고 경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즐기려고 테니스를 할 뿐"이라고 말했다.
최형철기자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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