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심히 노력해도 신분 상승 힘들어… 명품 소비가 최대 위안"
무너진 계층이동 사다리"현재를 즐기는 것이 최고" 구매력 낮은 20, 30대가 명품시장 큰손 부상돈으로 사람 평가상류층 소멸 부유층만 남아 명품 소비로 지위 경쟁… 허름한 차림새 하면 홀대놀이문화 없는 경쟁사회손쉬운 쇼핑이 취미 돼버려… 레저·문화 발달한 선진국은 명품 소비 훨씬 적어
입사 2년차인 호텔리어 김혜원(27ㆍ가명)씨는 심플한 디자인의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프라다를 즐겨 찾는다. 어두운 색 옷을 주로 입어야 하는 회사의 복장규정에도 잘 맞고, 다른 명품 브랜드들에 비해 입문 단계의 저렴한 아이템들도 다양하게 구비돼 있기 때문이다. 저렴하다고 해봐야 100만원을 훌쩍 넘지만, 12개월 무이자 할부를 이용하면 당장은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서울대 출신인 김씨가 명품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대학 때부터 명품에 관심은 많았어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자 친구들이 루이뷔통이나 샤넬 같은 명품백을 책가방처럼 메고 다니는 걸 자주 봤으니까요. 그러다 구매력이 생기니까 자연스럽게 억눌렸던 욕구를 해소하게 되더군요. 비싸긴 하지만 할부 하면 살 수 없는 건 아니잖아요."
김씨는 "예전에는 집이 잘 살거나 유행에 민감한 친구들이 주로 명품을 구매했다면, 이제는 연봉 실수령액이 2,000만원대 초반인, 평범하게 살아온 친구들까지 그 문턱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김씨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명품 소비는 왜 해소해야 하는 억압된 욕구가 되었을까.
꽉 막힌 계급사회… 소비가 최대 효용
김씨는 "우리 세대의 심리 기저에는 근본적 허무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사회 양극화와 그로 인해 고착화된 계급구조가 내면 깊은 곳에 허망함과 열패감을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때 유일한 위안이자 해방구가 돼 주는 것이 과시적 소비.
"아주 어릴 때부터 신분의 벽을 절감하며 자랐어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저축해봤자, 성공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요. 월급쟁이가 강남에 30평대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평균 생활비만 쓰고도 132년을 모아야 한다잖아요. 어차피 안 되는 거죠. 꿈, 희망, 그런 게 없어요, 우린."
김씨는 "연봉 2,000만~3,000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큰 효용을 주는 건 결국 소비"라고 했다. "나한테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인데다 가끔은 럭셔리하게 살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도 하니까요."
최근 명품 소비 열풍을 주도하는 층은 20, 30대로, 전체 명품 구매자 가운데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2007년 15.6%였던 20대 명품 구매자 비율은 2010년 18.4%로 늘었다. 30대는 명품 구매자와 구매액 비율 모두에서 부동의 1위. 2007년 이후 계속 증가해 올 10개월간 구매자 비율(39.5%)이 이미 전년치(38.7%)를 넘어섰다.
계층이동 사다리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현재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는 인식이 구매력 낮은 젊은 층을 명품 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케 한 요인인 셈이다.
외모가 모든 것… 타인의 시선이 무섭다
패션 MD로 일하며 아들 둘을 키우는 워킹맘 이유진(37ㆍ가명)씨는 친정 어머니가 쓰던 수천만원대의 에르메스 버킨백을 물려받아 사용할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제품의 품질이나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의 매력, 장인정신 깃든 기업의 철학 등을 감안하면 명품은 그만한 돈을 치를 가치가 있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이씨도 만난 지 몇 분 안에 전신을 훑어 차림새로 그 사람의 '견적'을 내는 타인의 시선에는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예요. 사람의 진정성이나 능력을 보는 게 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죠.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가장 단시간에, 손쉽게 나를 포장해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명품밖에 없어요. 적어도 들고 다니면 무시는 안 당하니까."
한국사회는 외환위기 이후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던 가치체계가 붕괴하면서 돈이 모든 것의 최종 판단 잣대가 돼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식도, 덕망도, 교양도 중요하지 않다. 사회지도층이라 할 만한 상류층은 사라지고, 부유층과 그들을 추종하는 그룹만 남아 소비로 지위경쟁을 펼치고 있다.
"명품 매장 직원들이 좀 허름하게 차려 입고 가면 제대로 응대를 안 해줘요. 그게 마케팅 전략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발끈해서 '어쭈, 내가 못 살 것 같아' 하며 지르니까." 이씨는 이런 분위기에 젖어 있다 외국 박람회에서 실수할 때도 있다고 했다. "한창 바쁜데 초라한 행색의 외국인이 이것 저것 물으면 순간적으로 찡그린 표정이 돼요. 그런 고객들이 재력 있는 바이어인 경우가 적잖은데…." 그럴 때면 이씨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진다고 했다.
숨막히는 경쟁사회… 놀이문화 없어
광고대행사 임원인 '골드미스' 오지영(39ㆍ가명)씨는 연이은 야근이나 극도의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나면 충동적으로 명품을 사곤 한다. 주5일 근무라지만 노동강도는 여전하고, 스트레스를 풀 마땅한 출구도, 시간적 여유도 없다. 문화생활에의 욕구는 크지만 뮤지컬 하나를 보려고 해도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프라가 빈약하다 보니 그마저도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불만팽배 상태 같아요. 그런데 레저도, 문화도 충족이 안 돼요. 결국 손쉬운 명품 소비에 빠져들어 쇼핑이 취미가 되는 거죠." 오씨는 "유럽 같은 선진국에 가 보면 명품의 본고장인데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며 "자기들만의 라이프스타일이 있으니 우리처럼 물건에 집착할 여유가 없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실제 LG경제연구소는 한 보고서에서 호주나 캐나다처럼 레저ㆍ문화 등 취미 활동이 발달한 국가일수록 명품 소비가 적은 반면 한국, 일본처럼 별다른 취미 생활이 없는 문화권에서는 소비 생활의 중요성이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명품 업체들이 선진국보다도 한국을 훨씬 더 중요한 시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소비문화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과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며 산 시간이 인생의 대부분이에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높은 연봉, 그런 것들에 매달리느라 자기를 탐구하고 성찰할 시간이 없었죠. 취미는 고사하고 제가 뭘 좋아하는지, 하다 못해 어떤 핸드백이 내 취향인지조차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호텔리어 김혜원씨는 "이런 사회 구조가 지속되는 한 (길거리 가다가 3초, 5초에 한번 꼴로 볼 수 있다는) '3초백', '5초백'은 계속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소비자본주의와 과도한 생존경쟁, 극심한 사회 양극화가 이루는 악순환의 삼각고리가 한국사회에 어플루엔자를 퍼뜨리는 강력한 숙주인 셈이다.
● 어플루엔자 감염 자가진단표
*다음 문장에 "예" "아니오"로 답하시오
-정말 부자가 되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나이가 들어가는 흔적을 감추고 싶다.
-찬사를 받고 싶다.
-사람들이 내게 매력적이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에서 뒤떨어지고 싶지 않다.
-대중매체에 내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으면 좋겠다.
-내 것과 남의 것을 자주 비교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그 사람만큼 중요하다.
-쇼핑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내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라면 관계를 끊을 수 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보다 그 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많다.
-값비싼 집과 차, 옷을 소유한 사람들이 부럽다.
-지금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할 수 있었다면 내 삶은 더 훌륭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소유할 것들이 내 삶을 규정할 것이다.
-호화롭게 살고 싶다.
진단: "예"라는 대답이 많다면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그렇다는 대답이 많을수록 당신은 더 깊게 감염되었으며 정서적인 혼란에 빠질 가능성도 높다.
*출처: 올리버 제임스의 (알마 발행)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이인선기자 kelly@hk.co.kr
■ 명품 살수록 불행해지는 이유
사람들은 명품을 소비하며 과연 행복해졌을까. '럭셔리 공화국, 코리아'는 그 이전보다 더 살 만한 사회가 된 걸까.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2009년 세계적 권위의 경제학술지 '이코노믹저널'에 실려 화제가 됐던 커티스 이튼 캘거리대 교수와 무케시 에스와란 브리티스 컬럼비아 대학 교수의 논문은 그 원인을 설명해준다.
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 따르면, 한 사회가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번영에 도달하게 되면, 그 이후 소비는 제품의 내재적 가치와는 별반 관계 없는 지위 상징(status symbols)을 추구하게 된다.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자신을 남과 구분해주는 과시적 소비를 추구하게 되고, 이것이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베블렌 효과'를 낳는 것.
문제는 이런 소비가 사회 전체로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점이다. 값비싼 보석이나 디자이너 브랜드의 의류, 고급 자동차 등을 구입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소유자를 만족시킬 수 있으나,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에겐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해 더 가난해진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한 개인에게 베블렌 상품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의 평균적인 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이후 사람들은 베블렌 경쟁이라는 무한 악순환의 쳇바퀴에 갇히게 된다. 루이뷔통 가방은 명품이지만, 모두 다 루이뷔통 가방을 들고 다닌다면, 에르메스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지위 상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의 증가로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신뢰가 악화되는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베블렌 경쟁이라는 제로섬 게임은 베블렌 상품을 구입하기 위한 노동 충동을 자극함으로써 공동체에 이바지할 가용 시간을 앗아간다. 공동체 의식과 신뢰는 한 경제의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중요 요소로, 이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논쟁하고 흥정하는 데 드는 비용을 낮춰준다. 때문에 과시적 소비가 일반화하면 사람들의 행복뿐 아니라 경제의 성장 가능성도 저해된다.
저자들은 미국처럼 유례 없이 큰 소득증가를 보인 국가들이 국민의 행복과 공동체 의식은 정체상태에 있는 것이 이 같은 제로섬 게임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구성원들은 불행해진다는 아이러니.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만한 분석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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