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왕이요? 부끄러운 이야기예요. 어서 집 장만하고 가족 만나야죠."
178cm의 훤칠한 키에 체크 남방을 입은 깔끔한 옷차림의 김정근(51ㆍ가명)씨에겐 노숙인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2년 넘게 집 없이 서울 성동구 송정동 서울시립24시간게스트하우스 등 노숙인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쉼터에 들어오기 전 10년 가까이는 하루 벌어도 하루 세 끼 밥값, 방값도 제대로 못 맞추던 노숙 인생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달 25일 제48회 저축의 날을 맞아 서울시가 선정한 노숙인 저축왕에 뽑혔다. 김씨는 '저축왕'이라는 단어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통장에 있는 돈은 몇 푼 되지도 않는데"라며 수줍게 웃었다. 하지만 김씨가 1년 넘게 모은 돈은 1,000만여원. 그가 얼마나 알뜰살뜰 모았고 각고의 노력을 했는지 잘 말해준다.
고향인 전북 군산에서 상고를 졸업한 뒤 공사장에서 형틀 목공 일을 해온 김씨는 이때까지만 해도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하지만 목공 일을 하며 번 1억원을 고향 선배 권유로 수산양식사업에 투자했다가 모든 것을 날렸다. 그는 "8년을 버티다 빚까지 떠안고 모든 걸 청산했다"며 "그 뒤부터는 부모형제와 연락을 끊고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마흔을 넘긴 김씨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목공 일을 찾았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 그마저도 쉽지 않았고 혼기도 놓쳤다.
그러나 10여 년을 방황하다 둥지를 튼 노숙인 쉼터가 그를 살렸다. 그는 쉼터 주선으로 지난해 7월부터 1년 동안 상계동 서울시립북부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지적장애인 직업교육 도우미로 일했다. 그의 월급은 90만원. 매달 65만원씩 모았다. 지난 3월부터는 서울시복지재단이 저축금액만큼 지원하는 저소득층 대상의 서울희망플러스 통장에 월 20만원씩 붓고 있다.
김씨는 요즘 조경 공부에 푹 빠져 있다. 식물 가꾸기를 좋아했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다가 조경관리기능사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3월부터 5개월 간 서울시립직업전문학교 야간반을 다녔고 지난 7월 자격증을 땄다. 최근 조경관리대행업체에 취직한 그는 "상놈에서 양반이 된 거 마냥 일이 생기니 기분이 좋다"며 "더 많이 저축하고 자립해서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또 김씨 외에도 4년 동안 1,800만원을 모은 노숙인 문모(72)씨, 자활센터에 세면도구만 들고 입소한 뒤 2년 반 만에 2,364만원을 모은 최모(41)씨도 노숙인 저축왕으로 선정했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김현빈기자 hb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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