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물가지수가 이달부터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정부는 다음달 1일 발표되는 11월 소비자물가 산출에 지난 5년간 사용해 온 '2005년 기준' 대신 새로 마련한 '2010년 기준'을 적용할 방침이다. 물가통계 기준 개편은 소비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항목과 각 항목에 붙는 가중치를 재조정하는 것이다. 온 국민이 자주 소비하는 대표 품목들의 조합인 만큼 조정 내용을 보면 그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다. 소비자 물가지수 편입 품목 개편에 담긴 우리네 생활사의 변천을 되돌아 본다.
올해로 75년째, 물가는 '장수' 통계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조사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6년 당시 경성상공회의소가 수도 경성의 물가를 조사한 게 시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은행이 47년 '서울소매물가지수'를 발표했다. 55년에 이르러 상품 일변도에서 벗어나 서비스요금까지 아우른 서울 소비자물가지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매 5년마다 물가통계의 기준도 조정되고 있다.
49년에 품목별 가중치를 적용한 '전국소매물가지수'가 최초 발표된 이후 한동안 서울 물가만 발표되던 것이 65년부터는 경제기획원 주도로 전국 주요도시 물가를 아우른 '전도시 소비자물가지수'로 업그레이드됐다. 90년 이후에는 독립관청으로 승격한 통계청이 매달 발표하고 있다.
소비자물가는 도시가구의 생활 물가가 대상이다. 농ㆍ어촌 등 비도시지역 물가는 제외되며 땅이나 금융상품, 예술품 같은 자산가격이나 세금 등도 대상이 아니다.
5년마다 품목조정, 조사대상도 50배 이상 급증
소비자물가 조사 대상은 5년마다 재조정된다. 이전보다 덜 쓰는 물건은 빼고 많이 쓰게 된 물건을 새로 넣는 식이다. 대상이 되려면 그 상품이나 서비스에 매달 쓰는 돈이 가계 월평균 소비지출총액의 1만분의1(2005년 기준 185원)이 넘어야 한다. 36년 첫 조사 때 불과 10여개였던 조사품목은 소비생활이 다양해 지면서 2000년에는 516개까지 늘어났다.
5년마다 들고 났던 품목에는 한국인의 생활상의 변화가 투영돼 있다. 40년 전인 70년 기준 물가품목에는 당시 '신(新)문물'이 대거 등장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갓 형성되기 시작한 중산층들이 흑백TV, 전축, 선풍기, 냉장고, 라디오 등 가전제품을 대거 소비생활의 대표품목으로 올려놓았다. 당시만 해도 지출 비중이 높았던 담배 중에는 '파랑새', '풍년초'가 빠지고 '한강', '청자'가 편입돼 즐겨 찾는 브랜드의 변화까지 읽을 수 있다.
75년에는 늘어난 이민과 해외 건설인력 파견에 따라 국제우편료가 추가로 반영됐고 병적증명서가 제외돼 눈길을 끈다. 80년부터는 가전제품 수요가 한층 고급화돼 컬러TV, 세탁기, 전기밥솥이 새로 등장했다.
85년에는 대학가 낭만의 상징, 생맥주가 새로 등장했고 전산ㆍ피아노ㆍ외국어 학원비가 대거 편입돼 이후 사교육 열풍의 출현을 예고했다. 흑백TV는 등장한 지 15년 만에 컬러시대에 밀려 퇴출 운명을 맞는다. 90년대 새 트렌드를 형성한 것은 수입쇠고기, 치즈, 햄버거 등 서양 음식들과 정수기, 전자레인지, 에어컨, 진공청소기, VTR, PC 등 고급 가전제품들. 반면 오랫동안 생필품의 지위를 누리던 성냥, 양초, 창호지 등은 탈락했다. 비둘기호 기차료가 사라진 것도 이 때다.
95년부터는 단층촬영료, 골프연습장ㆍ노래방이용료 등이 포함돼 여가생활 고급화와 고조된 건강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고 이동전화료가 처음 등장했다. 2000년엔 치과처치료, 마취료 등 전문의료 분야가 추가됐고, 자격증 응시료나 PC방 이용료도 물가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삐삐(무선호출기)는 등장 5년 만에 사라졌다.
가장 최근인 2005년에는 공기청정기, 비데 같은 건강관련 가전제품과 브로콜리ㆍ키위 등 웰빙식품, 모바일콘텐츠 이용료와 전자사전 등 정보통신(IT) 관련 상품이 새로 등장한 반면 밥상, 쌀통, 세숫대야, 서예학원비, 피아노조율비 등 어느새 '옛날 풍경'이 되어버린 품목들이 사라졌다.
이번 달부터 적용될 2010년 기준에는 스마트폰 이용료, 삼각김밥, 요양시설 이용료 등이 추가될 전망이다. 특히 전통주 막걸리가 포함돼 최근 막걸리 열풍의 강도를 짐작하게 한다. 대신 금반지, 캠코더, 유선전화기, 공중전화 이용료 등은 물가대상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다.
세월 따라 가중치도 변해
가격이 똑같이 10% 올라도 쌀과 콩나물 값 인상의 영향이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다수가 많이 사용하는 품목엔 높은 가중치가 붙는다. 대상 품목들의 가격을 단순 평균하는 데서 오는 오류를 없애기 위해서다. 수십년간 꿋꿋이 소비자물가 품목 지위를 지키고 있는 상품들도 가중치는 세월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인의 제일 필수 소비재 쌀은 65년만 해도 전체 소비지출의 5분의1(가중치 19.5%)을 차지했지만 갈수록 비중이 줄어들어 2005년 1.4%까지 축소됐다. 보리쌀 역시 같은 기간 4.9%에서 0.03%까지 급감했다. 한편 쇠고기는 65년 2.7%에서 2005년 0.9%로 비중이 많이 줄었지만 돼지고기는 0.85%에서 0.75%로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수도료와 전기료처럼 필수소비재이지만 가격이 물가에 맞춰 꾸준히 조정된 경우에는 오히려 가중치가 과거보다 높아지기도 했다. 65년과 2005년 사이 수도료 가중치는 0.55%에서 0.78%로, 전기료는 1.65%에서 1.9%로 올랐다. 택시나 시내버스 같은 대중교통 요금은 차가 거의 없던 시절부터 대중교통 활성화 시대, 자가용 시대를 거치면서 가중치가 높아졌다가 다시 하락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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