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요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9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국립발레단과 함께 한다는 소식은 공연 전부터 큰 화제를 낳았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모던발레임에도 불구, 객석 점유율을 98%까지 끌어올리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정명훈이 휘두르는 지휘봉에 의해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은 재탄생되었고, 이에 무대는 압축과 상징, 모던함으로 화답했다.
줄리엣의 김주원은 청순함 대신 과감하고 섹시함을 선택했다. 로미오의 이동훈은 기량은 무난했으나 캐릭터의 개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대신 캐플릿 부인역의 윤혜진의 발견은 큰 소득이다. 도도하고 섹시한 귀족 부인을 소화한 윤혜진은 공연 내내 강렬한 에너지와 특유의 카리스마를 분출하며 무대를 시종 압도했다.
기하학적 모양의 기둥과 그 사이에 설치된 가변형의 패널은 미니멀한 공간미학으로 모던한 이미지를 배가했다. '뫼비우스 띠'를 활용한 연출과 극중 인형극을 통해 등장인물의 운명을 예고하는 재치있는 장면은 특히 돋보였다. 마이요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현된 명장면으로 손색이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안무한 장크리스토프 마이요는 프랑스 출신으로 발레 명문 몬테카를로발레단 예술감독이다. 고전의 재해석과 현대적 추상을 아우른 그의 작품들은 이미 세계적 수준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발레안무가 마이요의 존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발레는 한 나라의 국력과 경제성장의 지표를 읽는 유익한 척도이다. 이는 세계 발레의 이동경로를 보면 금방 확인된다. 14세기 르네상스의 성지 이탈리아에서 발원된 발레는 프랑스와 북유럽을 거쳐 러시아로 향했고, 20세기 이후 미국을 경유하여 현재는 아시아권으로 이동하고 있다. 즉 국력과 경제력을 따라 서진하고 있는 셈인데, 최근 한국이 발레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우리나라의 발레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광복직후 일본유학파 한동인이 서울발레단을 창단, 서양 고전과 창작을 병행하며 붐을 일으켰으나 그의 북행으로 단절된다. 이후 국립발레단이 창단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았고, 여기에 민간 직업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이 가세하면서 한국발레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한국발레가 눈부시게 급성장한 것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서구적 식습관의 영향으로 발레하기에 유리한 체형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발레 본고장에서 수입된 선진 발레기법에 의한 체계적인 교육도 한 몫을 했다. 국제발레콩쿨에서의 수상소식이나 순수 토종의 발레인재들이 해외로부터 소위'러브콜'을 받는다는 소식도 이젠 그리 낯설지 않다. 한마디로 한국발레의 기량은 이제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다.
문제는 우수한 테크니션은 많은데, 훌륭한 발레안무가가 드물다는 것이다. 과거 발레를 휘어잡았던 나라들은 항상 기라성 같은 안무가들이 존재했다. 국립발레단 초대단장을 지낸 임성남도 척박한 토양에서 치열한 창작정신으로 한국적 전통을 소재로 적지 않은 작품을 안무해 우리의 문화적 자존감을 높였다. 그런 점에서 자생적 창작품의 부재속에 미학적으로 이미 검증된 해외 명품발레 재현에 치우쳐 있는 국립발레단의 행보는 다소 아쉽다.
진정한 의미의 발레 강국이 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단순한 기술주의를 넘어 전통과 문화를 꿰뚫는 안목과 역량을 갖춘 발레안무가 육성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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