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黃嗣永)은 1775년 서울 아현동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5품 정랑(正郞)을 지낸 황석범이다. 신동으로 열여섯 나이인 1790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자 정조가 그의 손을 직접 잡아주었다고 한다. 김훈은 소설 에서 그날의 황사영을 이렇게 묘사했다. '소년은 임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붉은 뺨에 엷은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웃음기는 몸 속 깊은 곳에서 피어 오르는 기쁨과 자랑인 듯싶었다. 공손하면서도 두려움 없는 얼굴이었다. 한 번도 억눌리거나 비틀린 적이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눈이 맑고 입술이 단정했다.'
■ 은 어린 황사영에게서 훗날 그의 운명을 감지하고 싶었다. 임금 앞에서 평생 머리를 조아리며 권세를 다투는 자들과 분명히 다르고, 세상의 근본을 보는 눈이 다른 마음의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한 천주교인을. 황사영이 서학에 입문하게 된 데는 처가의 역할이 컸다. 진사 급제한 그 해 늦가을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마리아)과 결혼한 황사영은 처삼촌인 정약전, 홍낙민과 함께 교리 공부에 심취했고,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최인길의 집에서 '엘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정식 천주교인이 됐다.
■ 황사영은 천주교가 당시 당파와 부패로 극도로 피폐해진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약(救世之良藥)이라고 믿었다. 이미 한계를 드러낸 유교를 대신할 사상이라고 확신한 그는 과거 응시도 포기한 채 포교에 적극 나섰다. 소설 의 노비 육손이, 마부 마노리에서 보듯 그에게 신분의 귀천은 없었다. 1801년 2월 처삼촌들이 체포되고, 4월에는 주문모 신부가 참수되고, 정순왕후가 직접 자신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자, 그는 상복(喪服)을 입고 충북 제천의 산골 배론의 토굴로 숨지만 결국 11월에 체포돼 27세에 대역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 토굴 은거 중에 그가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깨알 같이 쓴 1만 3,384자가 세상을 경악케 한 '황사영 백서(帛書)'다. 백서는 신유박해를 고발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조선을 청나라에 부속시키고, 서양 군함과 군대를 개입시키자는 제안까지 했다. 반역자, 시대상황이 낳은 극단주의자, 순교자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지 박해 때 핍박 받은'증거자'에 머물러 있는 그를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성인의 전 단계인 시복(諡福) 추진 대상자에 올려놓았다. 교황청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하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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