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가을아… 도성 밖에서만 널 찾았구나
고려시대 이제현(1287~1367)은 세 차례나 중국 구석구석, 당시로는 곧 세상의 경계까지 깊숙이 여행했다. 드물게 넓은 시야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이 양반이 그랬다.
"세상에 구경할 만한 경치가 반드시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도읍한 곳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운금루기(雲錦樓記)'ㆍ)
절정의 고개를 넘어 내리막에 접어든 가을. 물든 나뭇잎 한 번 제대로 못 본 채 내년을 기약하고 있었다면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려보자. 걷기 여행 작가 강세훈씨( 저자)와 함께 서울의 만추 서정을 골라 봤다. 채비는 교통카드 한 장과 편한 운동화, 그리고 한 줌의 여유면 된다. 이렇게 사느라고 닫고 있었던 눈과 귀를 열 만큼의 여유.
"형산(衡山), 여산(廬山), 동정호(洞庭湖), 소상강(瀟湘江)이 반 발짝만 가도 굽어볼 수 있는 거리 안에 있는데도 그런 것들이 있는 줄도 모른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슴을 좇느라 산을 보지 못하고 금을 움켜 쥐느라 사람을 보지 못해서이다. 가을 짐승의 터럭 끝은 살피면서도 수레에 실은 땔나무는 보지 못하니…"('운금루기')
▦삼청공원에서 심우장 지나 길상사까지
가을 나무 냄새를 깊게 들여마실 수 있는 코스다. 삼청공원의 울긋불긋한 숲을 지나 와룡공원까지는 다소 가파르다. 땀을 닦고 쉬었다가 말바위쉼터로 이어지는 성곽길에서 벗어나 삼청각으로 내려간다. 요정에서 고급 문화시설로 바뀐 삼청각에서 바라보는 북악산도 온통 가을빛이다. 내리막길을 택해 만해 한용운의 자취가 남은 심우장을 지나 북쪽으로 걸어가면, 서울 가을 풍경의 백미로 꼽히는 길상사 단풍나무를 만날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나와 11번 마을버스를 타면 삼청공원 입구에 내릴 수 있다. 길상사 방향에서 출발할 땐 4호선 한성대역에서 1111, 2112번 버스를 타면 된다.
▦화랑대역에서 제명호까지
구 경춘선 화랑대역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손때 묻은 역사를 나오면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줄 지어 서 있다. 넓적넓적한 낙엽을 밟으며 태릉 지나 삼육대에 이르면 불암산 숲길이 시작된다. 숲길은 상계역까지 이어지지만 학교 안에 있는 제명호까지만 가더라도 한적한 가을길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든 서어나무숲이 호수를 감싸고 있다. 생태경관보전지역이고 학교 교정이니 조용히 지나야 한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4번 출구를 나오면 삼육대 방향이다. 제명호까지는 약 1시간, 불암산 숲길을 따라 상계역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린다.
▦이화동 예술마을과 낙산공원
이화동 예술마을은 낙산공공미술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낡고 허름한 동네에 벽화를 비롯한 예술작품을 설치, 통영의 동피랑 마을 못지않은 아름다운 동네가 됐다. 가을엔 낙산공원까지 이어지는 알록달록한 골목에 빨갛게 물든 담쟁이가 더해진다. 새로 집을 짓고 길을 넓히는 공사로 예쁜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반나절 가을 나들이에 별난 재미를 주기에 넉넉한 풍경이 남아 있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와 직진하면 낙산공원 방향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 된다. 낙산공원에서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 있는 오래된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1호선 동대문역이 나온다.
▦앵봉산 나무들과 탑골생태공원
자작나무길, 아까시나무길, 소나무길, 팥배나무길을 걸어 앵봉산(230m) 정상으로 이어지는 나무 여행길이다. 크지 않은 숲인데도 100여종에 이르는 나무가 서로 다른 가을의 빛깔로 물들어 있다. 나무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어 살아 있는 식물도감 같다. 은평뉴타운을 조성하면서 발굴된 조선시대 석조 유물을 모아 놓은 탑골생태공원이 숲 초입에 있어 색다른 감흥을 준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4번 출구를 나와 탑골생태공원 방향으로 꺾으면 된다. 외진 곳이라 숲길로 향하는 이정표가 따로 없다. 만덕사 뒤편 폐사지 방향으로 오르면 된다.
▦노을공원 저녁바람
서울에서 가장 로맨틱한 낙조를 볼 수 있는 곳.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리아 '저녁 바람이 부드럽게'의 선율이 어울리는 언덕이다. 잎을 떨군 가녀린 나뭇가지와 억새 사이로 붉게 물든 저녁 하늘빛과 한강의 공기를 흠뻑 들이킬 수 있다. 억새밭이 장관인 하늘공원, 당당한 풍채의 메타세쿼이아 산책길이 산책로로 이어져 있다.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1번 출구를 나와 8번 마을버스를 타고 서부면허시험장에서 하차, 지역난방공사 쪽으로 걸으면 노을공원 입구가 보인다.
▦은사시나뭇길 걸어 서삼릉으로
서울의 서북쪽 경계를 막 벗어난 곳에 있는 호젓한 산책길이다. 소나무로 빽빽한 왕릉 경내도 좋지만 키 큰 은사시나무가 좌우로 늘어선 진입로가 한결 매력적이다. 종마공원이 있어 대관령처럼 너른 초지가 펼쳐져 있다. 사람 없는 이른 시간에 찾아가는 게 좋다. 일교차가 큰 가을 아침이면 뜨물빛 안개가 낮게 깔려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하철 3호선 삼송역이 가까우나 아파트 공사 중이라 원당역에서 출발하는 게 더 운치 있다.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다 배다리술 박물관에서 왼쪽 방향이다.
▦한강 하구 인적 드문 개화산
개화산은 132m의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서울시가 선정한 '생태문화길 우수 코스 30선' 중 첫 번째로 꼽힌 산책길을 품고 있다. 개화산역에서 출발해 개화산 공원과 약사사, 방화근린공원을 잇는 길과 방화습지공원과 행주대교 아래 제방길을 따라 걷는 길로 이뤄져 있다. 산길은 은행나뭇잎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고 억새밭 너머 습지엔 겨울 철새가 찾아온다.
●지하철 5호선 개화산역 2번 출구로 나와 직진, 개화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미사리 한강 억새밭
명성산, 신불산, 민둥산의 억새밭을 TV로만 보고 아쉬웠다면 미사리로 떠나보자. 조정경기장을 기준으로 하남 시내 방향은 카페촌이 형성돼 시끌벅적하지만, 한강 방향은 은빛 억새 물결로 출렁인다. 억새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다. 암사동 생태공원부터 이어지는 긴 제방에는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이 길게 도열하고 있다.
●지하철 5호선 상일역에서 340, 342, 3411번 버스로 강일리버파크 7단지로 간 뒤 10번 마을버스를 갈아타면 조정경기장에 닿는다. 경기장을 오른쪽으로 끼고 시계 방향으로 돌면 억새밭이 펼쳐진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사진제공 강세훈
■ 여행수첩/ 서울의 걷기여행 명소
●서울시 생태정보시스템(ecoinfo.seoul.go.kr) 사이트에서 서울의 걷기 좋은 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생태문화길' '숲속여행' '가을철 걷기 좋은 길 베스트 10' 등 주제별로 지도와 대중교통 이용 방법 등이 올라 있다.
●서울의 걷기여행 명소 13코스를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즐길 수 있다. 관광 희망일 사흘 전까지 서울시 문화관광 포털(www.visitseoul.net)로 신청하면 된다. 평일 오전 10시, 오후 2시, 주말 오전 10시 오후 3시. 이용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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