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새벽 물안개야… 그리운 추억의 문을 열어주렴
경춘선 마지막 비둘기호 열차는 1998년 2월의 어느 새벽에 출발했다. 밤새 마시고 찾아간 청량리역 바닥은 차가웠다. 시큼한 토사물 냄새 속에 발차 시각이 더디게 다가왔다. 나고 자란 곳이 춘천인 놈은 없었다. 춘천행 완행열차가 끊긴다는 사실은, 그러나 우리에겐 실향의 아픔과 맞비겨야 했다.
우리는 강촌의 화톳불을 쬐며 트로츠키의 이름을 들었고, 대성리 강변에서 아릿한 데이트를 했으며, 남춘천역에서 102보충대 버스를 기다리며 '이등병의 편지'에 취했다. 그날 그 기차에 올랐던 건 풋내 나던 시절과의 우리식 작별인사였던 것 같다. 그 '우리'도 이젠 없다. 새로 깔린 복선 전철처럼 낯선 '나'만 가득할 뿐.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이하 정태춘 '북한강에서')
일교차 큰 가을은 안개의 계절이다. 화학솜처럼 균질한 내륙 안개에 비해 강에서 피어나는 안개는 반투명 백색의 결이 갈라지고 다시 겹치며 물과 함께 흘러간다. 봄(春)내(川), 물줄기가 굵지 않았던 춘천은 춘천ㆍ의암ㆍ소양댐을 건설한 뒤 호수의 도시가 됐다. 경춘선의 끝, 의암호 안개에 젖어 젊음을 보낸 이영춘 시인은 어딘가 이렇게 적었다. "안개 때문에 뼈대 곧추세우지 못하고 안개꽃처럼 녹아내렸다. 내 사랑은."
완행열차가 사라진 다음 새벽 안개가 보고 싶을 땐 으레 한강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양수리까지 갈 때도 있고 내처 섬강이나 주천강에 이를 때도 있다. 굳이 의식하지 않는데도 춘천 쪽으로 난 길은 외면한 것 같다. 이유는 모른다. 아마 고통스럽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기억, 상처로 겨우 덧댄 상처에 다시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아침과 낮 기온이 크게 벌어진 지난 주말 안개를 보러 춘천으로 향했다. 여기엔 이유가 또렷했다. 권력과 돈을 쥔 자들의 포클레인질에 남한강이 공사판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 비하면 청평부터 가평, 강촌 거쳐 춘천에 이르는 북한강 모습은 변화가 적다. 젊은이들이 북한강변을 고리타분한 곳으로 인식하고부터, 경춘선이 전철화되고부터 이곳이 여행에서 통근의 공간으로 바뀐 덕인지도. 물안개는 짙게 피어올랐다.
춘천에서 가장 빽빽한 안개를 볼 수 있는 곳은 서면 의암댐 부근이다. 하지만 이곳에 2009년 송암스포츠타운이 들어서면서 의암호가 많이 가려지게 됐다. 춘천어린이회관과 마주보고 있는 중도, 의암댐 쪽에서 바라보는 붕어섬은 그래도 여전한 안개를 두르고 있었다. 해 뜨기 전 여명의 시간, 의암댐부터 춘천댐에 이르는 403번 지방도는 노인의 허연 입김 같은 공기를 선사했다. 지나는 자동차의 미등 불빛이 그 입김 속에 발갛게 번졌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제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파로호로 이어지는 방향과 폐선이 된 옛 경춘선 하행선 방향을 놓고 고민하다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강촌, 경강, 청평, 대성리… 유리로 새로 지은 전철 역사는 안개로부터 먼 곳에 자리잡았고 안개에 덮인 옛 역사는 인적이 끊겨 처연했다. 몽상과 치기가 뒤섞여 뜨겁던 어제와 냉소와 타성의 경계가 모호한 오늘이, 이제 열차가 달리지 않는 철길 위로 함께 흘러가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했다. 남이섬, 호명호수 찾아가는 단풍객을 실은 전동차가 부지런히 도착하고 있었다. 문득, 함께 토악질하던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춘천=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춘천 제이드가든 수목원, 숲 속에 생긴 유럽식 정원… 주말에도 호젓
서울에서 춘천 가는 길, 경춘고속도로 말고 옛 경춘가도를 이용할 느긋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춘천시 남산면 서천리에 새로 생긴 제이드가든 수목원을 들러볼 만하다. '숲속에서 만나는 작은 유럽'을 표방하며 올해 5월 문을 연 이곳은 비싼 관람료(성인 8,000원) 덕에 주말에도 비교적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16만㎡의 넓이. 수목원 치고는 좁고 정원의 기준으로는 넓다. 한국 중부 지역에서 자랄 수 있는 국내외 식물을 수집해 놓았는데 디자인이 한국 전통 정원의 법식과 거리가 멀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전원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입구 방문객센터의 담갈색 벽돌이 "여기부터는 유럽이오" 하고 말하는 듯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피우는 다년생 초화들을 영국식으로 꾸며 놓은 보더 가든, 이탈리아풍 정원에 수로를 중심으로 잔디밭과 화단을 꾸민 이탈리안 가든, 고산지대에서 자생하는 만병초, 양치식물류, 노루오줌류를 모아 둔 로도덴드론 가든 등 24곳의 정원과 수생식물원, 편의시설이 일자로 길게 줄지어 있다. 왕복 1.5㎞ 정도로 천천히 둘러보는 데 2시간 가량 걸린다.
서양식 정원 가꾸기를 가르쳐주는 가드닝 강좌와 수목원 해설, 나무 목걸이 만들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강원도 청정지역에서 나는 식재료와 블루베리 등을 쓰는 레스토랑과 카페도 갖추고 있다.
춘천=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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