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학기술부가 8일 발표한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은 언뜻 보면 보수, 진보 양측 의견을 절충한 듯하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보수 학계의 의견을 대부분 반영한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교과부가 지난 8월 집필기준의 상위 규범인 역사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 용어를 연구개발진의 의견을 무시한 채 뉴라이트 단체인 한국현대사학회의 요구대로 '자유민주주의'로 일괄 변경해 고시한 데 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지적이다.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집필기준뿐 아니라 역사교육과정을 원안대로 회복해 재고시하라"며 반발하고 있다.
첫번째 쟁점인 자유민주주의 용어와 관련, 교과부는 집필기준 초안에 4번 등장하는 '자유민주주의' 표현 중 하나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꿨다. 역사학계가 반공자유주의 혹은 시장자유주의로 통용돼온 자유민주주의 대신 그나마 헌법상의 표현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쓰자고 한 제안을 일부 수용한 것이다. 김관복 교과부 학교지원국장은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가 기본원칙이고 이에 충실하게 써야 한다"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곧 자유민주주의이고, 교육과정에도 자유민주주의로 돼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교과서 집필에선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에둘러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인 이인재 연세대 교수는 이에 대해 "자유민주주의가 헌법 이념임을 재차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며 "역사학계 다수가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를 써야 한다는 의견을 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최근 9개 역사학회 소속 205명의 역사학자와 11개 역사학회 학회장들은 역사교육과정 고시 자체를 민주주의란 용어를 사용한 원안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잇따라 발표했다.
두번째 쟁점인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의 승인을 받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은 보수 학계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됐다. 당초 집필기준 초안에 이 표현이 등장했다가 합법정부를 승인한 1948년 유엔 총회 결의가 38선 이남에 한정된 것이란 학계 지적에 따라 집필기준 개발연구진은 수정안에서 '한반도의 유일한'이란 대목을 삭제했다. 하지만 교과부의 자문위원회인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역추위)가 이를 다시 살린 것이다.
보수 학계는 "당시 북한 정부도 수립돼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만 유엔에서 승인 받았기 때문에 유일한 합법정부가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표현이 한반도 전체를 포괄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남북한이 각각 유엔에 가입해 있는 현 상황과도 맞지 않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역사 교육이 미래지향적 가치를 담아야 하는데, 전반적으로 냉전시대 남북 대결 구도를 조장하는 형태로 기술돼 과거 퇴행적이다"라고 비판했다.
세번째 쟁점인 '독재 정권'도 '독재화'란 모호한 표현으로 변경됐다. 당초 집필기준 초안에 독재라는 용어 자체가 삭제돼 큰 반발을 사자 개발연구진은 공청회 후 '독재정권에 의해 자유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기도 하였으나'란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역추위는 이를 다시 '자유민주주의가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로 시련을 겪기도 하였으나'로 바꿨다. 김관복 국장은 "독재정부나 독재정권이라 표현보다 넓은 개념의 독재화를 쓰자는 의견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오수창 서울대 교수는 "독재를 해서 장기집권을 한 것이지 장기집권의 결과로 독재가 나타난 게 아니다"며 "이런 모호한 표현으로 독재의 의미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학계 의견을 수렴하는 시늉만 냈을 뿐, 실제는 학계가 제시한 의견을 대부분 무시했다"며 "일부 뉴라이트 학자들의 역사관이 담긴 역사교과서를 밀어붙이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 교과부의 역사교육과정 고시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 용어 변경을 주도했던 한국현대사학회측은 대체로 만족한다는 반응이다. 회장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교과부가 고심 끝에 절충안을 낸 것 같은데, 일부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잘된 것 같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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