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연재만화 기록을 보유한 시사만화 '고바우'의 작가 김성환(79) 화백은 수집광으로도 유명하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밤시간 소일거리로 시작한 우표수집은 스웨덴 국제우표전에서 대금상(1986년)을 수상하는 국제 공인까지 받았다.
수집가들이 우표를 모으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우체국에서 새 우표가 나오는 날 편지봉투에 그 우표를 붙여 그날 소인을 찍은 우표를 모으는 '초일봉피', 그 봉투에 우표와 관련된 그림까지 그린 '카셰(cachet)'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편지를 보낼 때 봉투 접은 자리에 밀랍을 떨어뜨려 문장 새긴 반지로 찍어 봉인하는 것을 말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카셰는 특히 수집가들에게는 로망이다.
김 화백은 1965년부터 2006년까지 40여 년, 당대의 국내 화가들이 그린 카셰를 수집해왔다. 친분 있는 화가들에게 선물처럼 받은 것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원화와 맞교환 해 하나 둘 모았다. 김 화백은 삽화가 우경희를 시작으로 천경자, 김기창, 장욱진, 남관, 문신, 이왈종, 황주리 등 161명의 화가에게서 받은 550여 점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 이 중 화가 113명의 270여 점을 추려 모은 '다정한 편지' 전시가 9일부터 서울 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열린다.
"박수근 선생과는 가까운 동네에 살면서 자주 왕래할 정도로 친했어요. 내 전시가 열릴 때마다 방문해주셨는데, 돌아가시니 남은 건 방명록 사인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우정의 징표를 남겨보자 해서 시작한 거죠. 작품 한 점 달라는 것보다 작은 편지봉투에 그려달라는 게 오히려 쉽잖아요." 개막 하루 전날 갤러리에서 만난 김씨는 카셰 수집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그 자리에서 금세 그려준 작가도 있었지만 몇 달을 고심해 완성한 이도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로 김씨를 첫 손에 꼽는 천경자 화백은 늘 하는 작품 하듯 석채(동양화 물감)를 사용해 선명한 빛깔의 작품을 여러 점 그려줬다. 김 화백의 개인전 때 처음으로 선뜻 작품을 구매한 김기창 화백은 자신의 개인전에 그 편지봉투를 빌려갈 정도로 담박하면서도 운치 있는 그림을 완성했다. 김씨의 부탁을 듣고 볼펜으로 쓱쓱 그렸던 전상수 화백은 다른 이들의 작품을 보고 다시 그려 주기도 했다. 작품 크기는 작아도 담긴 정성은 이만저만 아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사람이 의외로 흔쾌히 그려줄 때도 있었고, 평소에 자주 어울리던 술친구가 오히려 주뼛거리는 일도 있었지요. 임직순 화백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소녀상을 수채화로 그려줬는데 아이처럼 순박하고 순수한 점이 박수근 선생을 많이 닮았죠." 김 화백의 카셰는 그가"힘들 때마다 기운을 북돋워 주"는 개인 소장품이자, 한국미술사에 기록될 소중한 흔적이기도 하다. 전시는 11월 24일까지. (02)726-4428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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