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로 도읍을 옮기고 새로 사찰을 지었는데, 정관 13년(639년) 겨울 하늘에서 큰 벼락과 비가 내려 제석정사(帝釋精舍)가 불에 타버렸다."
1953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된 중국 문헌 <관세음응험기> 에 나오는 이 기록은 백제 말 '익산 천도설'의 주요 근거 중 하나다. '무광왕'은 무왕(재위 600-641), '지모밀지'는 전북 익산시 금마의 옛 지명인 '지마마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실제로 익산의 금마면, 왕궁면 일대 역사유적지구에는 백제의 왕궁 터, 국가 사찰인 미륵사지, 무왕과 부인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 등 많은 백제 유적이 남아 있다. 익산은 백제의 왕도였을까. 관세음응험기>
'백제 말기 익산 천도의 제문제'를 주제로 10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회의는 이 수수께끼를 집중 검토한다. 익산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싶어하는 전북도와 익산시가 마련한 자리로, 한중일 학자 10여명이 발표하고 토론한다.
백제 말 익산 천도설은 <관세음응험기> 말고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천도설, 천도계획설, 별도(別都)설, 별궁설 등 여러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조금씩 실마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475년 웅진(공주)으로 급히 천도했다가 538년 사비(부여)로 재천도했고,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온 660년 웅진으로 피했다가 붙잡힌 의자왕이 사비성으로 끌려와 항복례를 올림으로써 멸망했다. 관세음응험기>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백제가 사비에서 다시 익산으로 옮겼다가 사비로 돌아가 멸망했다고 본다. 그는 "건축 부재 등 제석사 화재의 잔재물로 보이는 폐기물 처리장이 제석사지 바로 옆에서 발굴됨에 따라 <관세음응험기> 기록의 신빙성이 입증됐다"며 "백제의 시조신을 모신 묘사로 보이는 건물지가 제석사지에서, 천지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인근 신동리에서 확인된 점도 익산 천도설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한다. 또 "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오는 백제의 국가사찰 왕흥사는 그 내용과 미륵사의 가람 규모, 특이성 등으로 볼 때 미륵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관세음응험기>
이번 학술대회에서 '백제 왕권의 사비 경영과 익산'을 발표하는 야마모토 다카후미 일본대 교수는 "7세기 초 백제는 동아시아 고대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성숙한 단계이며, 이 시기 익산의 유적들은 동아시아 고대국가의 도달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익산이 왕도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견해다.
익산 천도설은 미완의 주제다. 정말 왕도라면 왕궁 외에 관청, 도로망, 방어시설 등도 있어야 하지만, 이 시설들이 있을 왕성 바깥은 아직 발굴이 이뤄지지 않아 확인이 안 됐다. 무왕이 사비궁을 수리하는 동안 익산이 아닌 웅진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익산 천도설을 의심하는 근거 중 하나다. 익산 천도를 추진하고 경영한 주역이 무왕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웅진시대 동성왕이라고 보는 학설도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동성왕과 익산의 관계를 살펴보는 논문은 박중환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발표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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