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세르누다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벌거숭이 발로 유리알을 밟는 일, 또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정면으로 얼굴을 맞대고 태양을 바라보는 일.해변은 죽어가는 아이 하나하나를 위해 시간과 나날을 헤아린다. 하나의 꽃이 벌어진다,하나의 탑이 허물어진다.모든 것은 마찬가지. 나의 팔을 펼쳤다, 비가 오지 않았다. 유리를 밟았다, 해가 없었다. 달을 바라보았다. 해변이 없었다. 무슨 상관이랴. 너의 운명은 일어서는 탑을 바라보는 일, 열리는 꽃을,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일, 그밖에, 화투장을 잃어버린 화투처럼 그냥 우두커니 서서.
● 연구실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문밖에서 누군가 왔다가 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보니 교내 동성애 인권 동아리의 행사 팸플릿과 소식지를 넣은 봉투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문학동아리나 연극동아리 학생들은 문을 열고 들어와 '선생님 저희 행사해요. 꼭 오세요!' 씩씩하게 웃고 갑니다.
루이스 세르누다는 아름답고 슬픈 시들로 유명한 스페인 시인입니다. 동성애자였던 그에게 생은 눈을 찌르는 태양을 대면하듯 고통스럽게 진실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었을까요? 학생인권조례에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금지 조항을 넣은 문제로 논란이 있었습니다. 차마 연구실 문을 못 두드리고 살짝 다녀간 그 친구의 열여섯, 열일곱 살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그 순하고 푸른 날들을 살아가는 한 아이에게 산다는 것이 맨발로 유리알을 밟는 일 같지 않게 하려면 그 한 줄의 조항 말고도 무얼 더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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