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극을 보면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주체하기 어렵다. 불과 몇 년 만에 공수(攻守)의 처지가 뒤바뀐 가운데 그 주도자들이 서슴없이 일구이언(一口二言)하거나, 협상과 타협 대신 물리적 충돌을 불사하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아니 분노가 패션처럼 번지는 글로벌 양극화와 혼돈의 시대에 한미 FTA가 새롭게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내년 선거를 앞둔 정략적 계산, 아집처럼 보이는 확신들만 판치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기자는 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 체결에 적극 찬성한 '확신범'이었다. 몇 가지 이유에서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호령하던 때였고, FTA는 시대의 흐름을 앞장서 반영하는 트렌드였다. 그런데다 당시 우리의 주력 산업은 정체돼 있었고, 미래의 신성장 동력은 보이지 않았다. 2010년 반도체를 제외한 주력 제조업 대부분이 중국에 따라잡힌다는 국책 연구기관의 암울한 보고서도 나왔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수출마저 밀린다면, 일본에 치이고 중국에 쫓겨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한미 FTA는 이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돌파구로 보였다. 이른바 '자주파'와 '동맹파'로 나뉘어 삐걱대던 한미 안보동맹의 틈도 FTA 경제동맹으로 벌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007년 협정 타결 이후 4년여의 세월이 지나면서 확신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한미 FTA 없이도 주력 대기업들이 미국 시장에서 잘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FTA 발효로 당장 손에 잡히는 이익은 분명하지 않은 반면 농업ㆍ서비스ㆍ제약ㆍ중소기업 부문 등에서의 피해와 위험성은 큰 것 아닌가, 우리의 역량이 더 신장됐을 때 FTA를 해도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2008년 미 금융 위기에 이어 작금의 유럽 재정 위기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퇴조하면서 그 흐름의 대표선수 격인 FTA에 대한 믿음도 흐려지고 있다. 지금은 '99 대 1'로 상징되는 글로벌 양극화 시대다. FTA가 양극화의 주범 가운데 하나로 꼽히면서 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한미 FTA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견해, '개발시대도 아닌데, 언제까지 특정 계층의 희생을 발판으로 성장 정책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항변 등을 과거처럼 귓등으로 흘리기 어렵게 됐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타격을 입었다고는 하나, 하루 아침에 미국 중심의 세계무역질서가 바뀔 리 만무하다. 투기자본의 국제적 흐름에 대한 규제 강화와 함께 시장에서 정부의 역할은 커지겠지만, 글로벌 무역 역시 계속 증대될 것이라는 점에서 FTA는 여전히 필요하고 유효하다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2008년 이후 새롭게 나타나는 흐름들이 한미 FTA의 전반적 기조는 물론 구체적 조항 속에 충실히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ISD(투자자ㆍ국가 제소권)조항에 대해 참여 정부 때 체결된 것을 염두에 두고 "자구(字句) 하나 바꾸지 않았다"는 여당의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FTA는 한번 시행하면 돌이킬 수 없다. 더욱이 초강대국 미국과의 FTA는 파장을 가늠키 어렵다. 최종 비준 도장을 찍기 전에 예상되는 모든 부작용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고 끝까지 조항에 담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 셈법을 떠나 비준안의 국회 통과는 서두를 일이 아니다. 국가 미래의 중ㆍ장기적 비전 속에 FTA의 가치를 공감하고, 전략적 활용을 고민하는 '숙의(熟議)의 시간'이 필요하다.
박진용 산업부 차장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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