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TV 방송이 언제 시작됐는지 알아? 1956년이야. 실질적인 시점은 61년 KBS가 생기고부터지. 그리고 67년 TBC, 69년 MBC가 차례로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TV시대가 열렸어. 내가 연극 무대에서 막 TV로 넘어온 게 그때야. 잠깐 몇 달, 선거법 제한 때문에 방송에 출연 못했던 시간을 빼면 평생을 카메라 앞에서 보냈지. TV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가장 많이 보고, 또 가장 많이 느꼈을 거야. 방송국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말이야.
결론부터 말하지. 난 요즘 TV가 너무 자극을 좇아가는 것 같아. 연예인인 내가 나서서 못마땅한 내색을 하는 게 좋지 않을 듯해서 참았는데, 얼마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를 하고 있지. TV가, 방송이 잘못돼가는 것 같다고. 그냥 나이 먹은 죄로 쓴소리 하는 역할을 스스로 맡은 거야. 세상에 막장이라니…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이 너무 생각이 짧아. 그런 식으로 하면 결국 TV라는 매체가 무너지고 말아.
미국 의회를 방문했다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어. 이후 강연할 일 있을 때마다 내가 하는 단골 얘깃거리가 됐지. 뉴딜 정책 이야기였는데 미국 의원 중에 누군가가 그러더군. 뉴딜 정책이 경제 정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문화 정책이다, 루즈벨트가 투자한 건 토목산업이 아니라 연예산업이다, 라고. 엄청난 불황이었지만 TV나 영화 산업에는 은행 문턱을 오히려 낮춰줬다고 해. 대출 조건은 '작품 속에 개척정신과 정의, 사랑, 인도주의가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는구만.
사회적인 시련과 혼란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이 대중문화 매체에 있다는 걸 내다본 혜안이야. 루즈벨트는 "공황 시기에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나 신경 쓴다"는 비난 여론에 시달리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더군. 존 웨인, 게리 쿠퍼, 제임스 스튜어트 같은 배우들이 등장해 '미국적 정의'의 이미지를 창조해낸 게 바로 그 시기야. 물론 백인 중심, 남성 중심의 한계도 있지. 어찌됐든 "부자 나라를 만들기 전에 훌륭한 미국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TV로 구현됐던 거야. 그 바탕 위에 경제적으로도 회생할 수 있었던 거고.
그런 영향력은 우리나라에서 더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을 거야. 1995년에 중ㆍ고등학생 8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어. 국회 교육위원회에 있을 때였어. 닮고 싶은 인물을 묻는 질문에 남학생의 80% 이상이 최민수, 여학생의 70% 이상이 고현정이라고 답했어. 드라마 '모래시계'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때였거든. 방송으로 잔뼈가 굵은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지. 아! TV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정치 문화 경제 철학 종교를 다 조종할 수 있는 게 TV야. 방송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늘 두려워해야 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사회가 방향을 틀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우린 지금 어때? 난 답답해. 욕하면서도 본다는 말 있잖아. '막장 드라마'라고 욕하면서. 비도덕과 비윤리가 안방으로 쳐들어오는 데 TV가 도구로 쓰이고 있어. 그걸 걸러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령대의 시청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건지…. 재미 있는 것, 화려한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냐. 하지만 TV가 가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생각해야지. 국민의 80%는 습관적으로 TV를 본다고 하잖아. 집에서 리모컨 버튼만 누르면, 그때부터는 TV가 보여주는 것에 무방비로 노출돼. 노크 없이 안방에 들어갈 수 있는 권력을 TV가 가진 거지. 그러니까 열 번, 백 번 고민을 하며 만들어야 해.
나쁜 프로그램? 그렇게 집는 것보단 좋은 프로그램 중에 아쉬운 점을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른바 예능이라는 범주에 드는 프로그램 중에 내가 좋게 봤던 게 MBC의 '무릎팍도사'야. 초대 손님의 진솔한 삶의 얘기를 들을 수 있잖아. 아주 우스꽝스러운 분위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제작진과 출연자의 능력이겠지. 근데 이 프로그램도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우와-' 하면서 일어서서 '팍, 팍, 팍' 그러고. 자극을 더 주려고 하는 건데, 그냥 조용한 얘기 속에서도 재미는 가능해. 자극의 소재가 다 떨어지고 나면 방송을 어떻게 만들 건지 걱정이야. ▶ 강호동 은퇴, 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다?
오락적 요소가 의미 없다는 건 아냐. 사람들은 TV에서 즐거움을 바라지. 하지만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방법이, 정말 웃통을 막 벗어 젖히고 그런 것밖에 없을까? 생각해 봐. 수입해서 한국에서도 방송하는 미국이나 일본 TV 프로그램, 정말 인기 있는 것 중에 막장이라 할 만한 요소가 있는지 말야.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도 목적이 있고 자기 중심이 있어야 해. 내가 했기 때문에 조금 낯뜨거운 얘기지만, '수사반장'이나 '전원일기'는 각각 정의와 가족이라는 주제의식이 있었어. 그래서 오래갈 수 있었지. 그런 게 없으면 결국 도태하고 말아.
물론 지금이 '수사반장' 때처럼 단순한 세상은 아니야. TV에 나오는 범죄자를 진짜 범죄자로 착각해 신고하고 그런 에피소드는, 이제 정말 흑백 화면 같은 기억일 뿐이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가장 많은 정보와 오락을 TV로부터 얻어. 한번은 어떤 방송국 이사랑 언쟁을 벌인 적도 있어. 그 양반은 오락은 무조건 재미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 내가 그랬지. "오락이라는 게 뭐요? 진지하고 교육적인 것이라 해도, 보는 사람이 지루하게 여긴다 해도, 그것도 오락인 거요. 자신의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보는 거니까."
난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묘사한 빅브라더의 존재가 요즘 세상의 TV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방송인들이 그런 권력을 쥔 거지. 근데 방송국에 들어오는 인재들 보면 죄다 좋은 대학에서 법학과, 금속공학과, 경영학과 졸업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잖아. 난 시험 성적보다, 삼류대 출신이라도 TV의 영향력을 무겁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을 뽑았으면 좋겠어. 작년 상암동에 드라마프로듀서스쿨이 문을 열었을 때 내가 가서 그런 얘기를 했어. 거기도 시험으로 학생을 뽑거든. "공부 잘 한 거 다 잊어버려라. 그리고 TV가 진짜 뭔지부터 배워라."
방송국들도 차별성을 가졌으면 좋겠어. 지금은 한 방송국에서 뭐가 잘 된다면 '우~'하고 다들 똑 같은 걸 만들어내잖아. 젊은 시청자들이 SBS 많이 보는 게 사실이지. 근데 KBS가 그걸 따라할 필요가 있을까. KBS는 수준 높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승부하면 돼. 영국 BBC나 일본 NHK처럼. MBC는 드라마 잘 만드니까 거기 집중하고. 채널 돌릴 때마다 조금 다른 면이 있어야 시청자들도 지루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똑 같은 연예인, 똑 같은 프로그램이 시간대까지 겹쳐 있으니 결국 막장 경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해, 나는.
이거 내가 오늘 80년대 도덕 선생님 같은 소리만 잔뜩 늘어놨구먼. 사실 나도 오락적인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했어. 시트콤에도. 근데 두 달 정도 하다가 관뒀지. 작가들이 생각이 부족하더라고. 시트콤이라고 엉뚱한 상황만 갖고 웃기려 들면 안 돼. 그건 질 높은 코미디가 아냐. 아무튼 요즘 TV는, 누군가는 나서서 좀 쓴소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야. 그렇지 않으면 머잖아 TV가 저질 매체로 인식될 거야. 그 아슬아슬한 전환점이 느껴져, 평생 TV 속에서 살아온 나는 말야.
정리=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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