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사진으로 보는 이 주일의 小史] (29) 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이 주일의 小史] (29) 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입력
2011.11.07 07:59
0 0

독일과 세계를 동서로 가르며 분단과 냉전 체제의 상징이자 유산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 9일 붕괴됐다.

2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자유를 향한 28년의 외침과 탈출의 시간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패망을 향해 치닫던 45년 2월 연합국 대표였던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등의 얄타회담 합의로 전후 베를린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대국의 공동 관할에 들어갔다. 49년 동독과 서독 2개의 독일 정권이 수립됐고 이 때부터 동독 국민들의 서독을 향한 대량 탈주 사태가 이어지자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는 61년 전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구축했다.

철야로 이어진 이틀간의 공사를 통해 베를린 시내 브란덴브루크 문을 중심으로 높이 1.8m, 두께 40cm, 길이 44.8km로 설치된 베를린 장벽은 냉전과 함께 전기철조망까지 가설되면서 서독에선 ‘치욕의 벽’ 동독에선 ‘반 파쇼 보호벽’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가졌던 헬무트 콜 서독 총리의 의지와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 개방 정책은 양국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89년 5월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하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몰려들며 동독의 체제 붕괴를 앞당겼고 여기에 “피난민이 10만 명은 될 것”이라는 콜 총리의 발언이 이어지자 동독에서의 탈출 행렬은 현대판 엑소더스로 발전했다.

민주화를 향한 동독의 반정부 시위대가 100만 명까지 불어나자 89년 11월 9일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인 권터 샤보스키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동독의 모든 국경을 전면 개방한다.”고 밝혔다.

동베를린 시민들은 일제히 베를린 장벽 앞에 모여들었고 하나 둘씩 검문소를 넘기 시작했다. 경비를 서던 군인마저 서독의 품으로 향하고 있었다. 검문소를 넘자 장벽을 넘어 대기하고 있던 서베를린 시민들이 샴페인을 터뜨리며 이들을 맞았다. 30여 년만의 만남은 격렬한 포옹과 환호로 이어졌고 이들은 밤새도록 서로를 얼싸안으며 장벽 붕괴의 기쁨을 만끽했다. 통일 독일의 미래가 눈 앞에 다가온 장면이었다.

90년 10월 독일은 통일됐고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지금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져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