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비리 사건이 전국을 뒤흔든 게 불과 6개월여 전인데, 국무총리실까지 나서 요란을 떨었던 금융감독 개혁 작업이 용두사미로 끝나가고 있다. 혁신안의 핵심인 금융소비자 권익 강화는 온데간데 없고, 같은 식구인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밥그릇 다툼만 요란하다.
진흙탕 싸움을 지켜보던 국민들의 시선이 싸늘해질 기미를 보이자 겉으론 갈등을 봉합하는 척했지만 여전히 수면 아래선 이전투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그간 대립을 딛고 금융소비자보호원(가칭) 신설(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에 대한 큰 틀의 합의를 이뤘다고 4일 밝혔다. 금융위 고위관계자는 "최근 양측 간부들이 만나 법 제정에 대부분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감원 관계자는 "몇몇 세부적인 쟁점이 남아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합의의 골자는 금감원이 금융소비자 보호조직을 떼내 인사 및 예산에서 독립성을 지닌 금융소비자 보호기관(준 독립)을 내년 초 설립한다는 것이다. 금감원장의 추천을 거쳐 금융위가 임명하는 기관장은 금감원 부원장 급으로 두되, 기존 금감원 부원장 직제는 유지된다. 각 금융권역 법에 흩어진 영업행위 규제 위반에 대한 제재권은 금융위가 갖도록 했다. 다만, 금융소비자 보호기관은 금감원과의 권한 상충을 피하기 위해 검사 및 제재권을 갖지 않는다.
쉽게 말해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인사권과 제재권을 적당히 나눠먹은 것이다. 정작 저축은행 사태로 불거진 소비자 보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은 조직 이기주의에 밀려 찾아볼 수 없다. 금융위는 이르면 16일 열리는 정례회의에 이 같은 수정안을 보고한 뒤, 입법예고와 부처 협의 등 후속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양측의 누더기 봉합은 애초 태생부터 문제였다. 5월 초 이명박 대통령이 금감원의 부정부패를 질타한 뒤 부랴부랴 출범한 총리실 민관합동 금융감독 혁신 태스크포스(TF)는 수명을 두 달이나 더 연장했지만, 민간위원 사퇴와 불협화음으로 만신창이가 되면서 금융소비자보호원 신설 문제를 '중장기' 과제로 처박아뒀다. 결국 TF는 수년간 지속된 문제제기를 무시할 수 없다며 9월 '금감원 내 금융소비자 보호조직을 준 독립기관으로 존속시키기로 함'이라는 현실적인 결론을 냈다.
그러나 지난달 19일 금융위가 정례회의에서 보고한 초안 내용이 알려지면서 금감원이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금융위가 명분을 앞세워 금감원의 핵심기능인 검사권과 제재권, 나아가 인사권까지 빼앗으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고질적인 알력이 도진 것이다.
금감원 노조 등이 "금융위의 인사적체 해소용 꼼수" "관치금융 부활" 등을 내세워 연판장을 돌리고 항의시위까지 벌이자, 금융위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맞받았다. 행정고시 동기인 양 수장의 관계마저 틀어졌다는 관측이 나왔지만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권혁세 금감원장은 "실무진 사이의 다툼"이라고 애써 외면했다.
결국 내년 상반기까지 금융소비자 보호기관을 어떻게든 출범시켜야 향후 금융감독체계 개편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금융위가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기관 명칭(원이냐, 처냐)이나 기관장 임명 방식(민간 영입이냐, 금감원 내부 발탁이냐) 등에 대한 견해차가 있고, 가뜩이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금감원 내부 반발도 여전해 소리만 요란만 빈 수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금감원이 분리 가능성을 우려해 제안했던 '금융소비자보호처(處)'라는 명칭은 법제처가 부적절하다고 제동을 걸었다.
전문가들은 개혁은 없고 이기주의만 난무하는 조직 개편은 안 하는 게 낫다고 비판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현 체제의 금융소비자 보호기관 신설은 땜질에 불과하다"며 "금융감독 체계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욱 참여연대 사회경제팀 간사는 "금융소비자 보호기관을 금융당국 산하에 두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인데 그나마도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있다"며 "저축은행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금융정책 실패와 감독소홀, 사후정책 미비 등 금융당국을 견제할 독립적인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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