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진범은
2007년 5월 14일 오전 경기 수원시 A고 화단 옆에서 노숙생활을 해 오던 김모(당시 15)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수원역의 노숙인 정모(33)씨와 강모(33ㆍ정신지체2급)씨를 붙잡아 자백을 받았다. 검찰은 같은 달 상해치사 등 혐의로 이들을 구속 기소했다. 재판은 술술 진행됐다. 강씨에게는 1심에서 벌금 200만원이 선고됐고, 정씨는 2심에서 징역 5년이 확정됐다.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 했지만 물적 증거는 없었다. 이들의 자백이 유죄의 유일한 근거였다.
죽은 자는 있지만 죽인 자는 없다
지난달 27일 수원지법 항소심 재판부는 "노숙소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정씨의 법정 진술이 위증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노숙소녀 살인범으로 복역 중인 정씨가 진범이 아닐 수 있다는 반전이 벌어진 것이다. 정씨의 진술은 자신의 재판이 아닌 검찰이 2008년 1월 상해치사 공범으로 추가 기소한 최모(당시 18)군 등 노숙청소년 4명에 대한 1심 재판에서 이뤄졌다. 최군 등은 지난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내 약 1년 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끝냈다.
수원지법은 29쪽이나 되는 판결문을 통해 정씨 증언이 위증이 아니라는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수원역과 A고 앞 폐쇄회로(CC)TV 어디에도 정씨 모습이 찍히지 않았고, 약 40분간 폭행했다는 사건현장에서는 어떤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 폭행 추정시간(사건 당일 오전 3시)과 사망 추정시간(전일 오후 11~12시)도 일치하지 않고, 특별한 범행동기 없이 수원역에서 1.5~2㎞나 떨어진 A고까지 함께 걸어갔다는 것도 객관적인 정황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정씨의 상해치사 사건이 아닌 위증사건에 대한 판결이지만 내용상으로는 4년6개월 간 복역 중인 정씨가 진범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검찰이 기소했던 최군 등도 진범이 아니고, 정씨도 아니라면 진범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검찰이 상고를 하면서 위증사건 최종 판단은 대법원 몫으로 넘어갔다.
하나의 사건, 두 번의 수사, 15번의 판결
노숙소녀 살인사건은 희한한 형사재판 기록을 쏟아내고 있다. 시기를 달리해 경찰과 검찰이 각각 사건을 수사한 것도 드문 일인데, 경찰과 검찰 모두 법정에서 어떤 물증도 제시하지 못했다. 기소된 6명의 진술 증거에 의해서만 재판이 진행되다 보니 유죄와 무죄 판결이 반복됐고, 급기야 검찰이 형을 살고 있는 증인을 다시 위증 혐의로 기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건은 하나지만 수사가 두 번 이뤄지고, 위증 재판에 이어 위증사건 재심까지 진행되며 노숙소녀 살인사건은 이리저리 얽혀 버렸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내려진 각급 법원의 선고와 결정만 10번이고, 이달 7일에는 강씨 위증사건 항소심 선고가 예정돼 있다. 앞으로 있을 정씨와 강씨 위증사건 상고심에 정씨가 대법원에 청구한 상해치사 사건 재심까지 개시되면 노숙소녀 살인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최대 15차례에 이르게 된다.
2008년 노숙청소년들 1심의 국선변호사를 맡은 뒤 4년째 무료변론을 하고 있는 박준영(37) 법무법인 경기 변호사는 "한 사건에 15번의 판결이 이뤄지는 것은 사법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사회적 약자인 지적장애인, 노숙인, 가출청소년을 붙잡은 뒤 자백에만 의존한 잘못된 수사가 결국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누가 노숙소녀를 죽였나
박 변호사는 진범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제 3의 범인이 존재할 정황은 이미 여러 군데서 나타났다. 2007년 7월 8일 한 언론사에 '정○○'라는 이름으로 달린 댓글이 그 중 하나다. '이거 거짓말이잖아요. 저 그때 친구들이랑 있었는데 걔네들이 패서 기절하니까 근처에 두고 왔다는 거 알아요'라는 내용이었다.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이 언론사는 현재 문을 닫았다. "숨지기 3일 전 남자친구, 여자친구와 집에서 같이 잔 뒤 다음날 반지 목걸이 옷 등을 챙겨 나갔다"는 노숙소녀 어머니의 법정증언(2008년 말 최군 등 항소심)도 의미심장하지만 역시 증언으로 끝나고 말았다.
박 변호사는 노숙소녀 사망 원인이 또래에 의한 집단폭행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택가와 인접한 시신 발견 장소와 누군가 업어다 놓은 듯한 발견 당시 모습으로 미뤄 다른 곳에서 폭행한 뒤 옮긴 것으로 본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공개수사를 하면 진범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한다.
문제는 언제 있을 지 모를 대법원의 재심개시 결정이다. 재심에 신중한 대법원의 성격상 어쩌면 정씨가 형기를 다 마치고 출소할 때까지 결정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박 변호사는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서 억울한 이가 없어야 한다"며 "만약 내게 잘못이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수원=글·사진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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