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의 미디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전횡이 검찰 수사를 통해 여과없이 드러났다. 사무총장의 말 한 마디로 케이블방송사는 속수무책으로 특정업체와 계약을 맺었고, 시청자 민원까지 모두 묵살시킬 수밖에 없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이중희)는 외주 프로그램 제작사 N사 대표 권모(39)씨로부터 억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김구동(63) 방송위원회(방통위 전신) 전 사무총장을 구속 기소했다고 3일 밝혔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 7월 사무총장에 선임된 김 전 총장은 그 해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수수한 뇌물만 무려 4억3,400만원에 이른다.
특히 이번 수사를 통해 '케이블 방송사가 방통위를 법보다 더 무서워한다'는 말이 소문이 아니라는 게 확인됐다. 검찰에 따르면 권씨는 외주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민원을 해결하고자 김 전 총장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권씨는 우선 방송사 기자 출신으로 청와대 출입을 한 오모씨를 회사 고문으로 영입, 오씨를 통해 김 전 총장과 연을 맺었다. 당시 권씨 회사의 직원이 케이블방송 A사에 납품할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A사를 사칭, 취재 대상업체에게 금품을 요구한 것이 문제가 됐다. 오씨를 통해 무마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김 전 총장은 부하직원에게 이를 해결하라고 지시했고, 업체가 제기한 민원은 '처리불능'이라는 이상한 결과로 종결됐다. 4개월 뒤 N사 직원은 또 다시 취재대상업체에게 금품을 요구해 방송위에 시청자 민원이 제기됐지만, 이 역시'처리불능'으로 끝났다. A사도 문제투성이인 해당 프로그램을 폐지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김 전 총장이 A사 사장을 만나 "N사를 많이 도와줘라. 대신 내가 A사 관련 심의는 챙겨주겠다"는 말로 모든 상황이 정리된 것이다.
방송위의 막강한 힘을 체험한 권씨는 이를 이용, 매출 증대에 나섰고 김 전 총장 덕분에 프로그램 외주계약도 성사시켰다고 검찰은 밝혔다. 김 전 총장은 유명 케이블 B사 경영진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만나 "N사가 B사에 프로그램을 송출하고 싶어한다"고 말했고, N사는 그 후 프로그램을 따냈다. 같은 방식으로 대형 케이블 C사, D사도 "N사를 잘 부탁한다"는 김 전 총장의 말에 N사에게 프로그램을 맡겼고, 심지어 홈쇼핑 E사도 N사에게 방송시간을 내줬다.
그러나 청탁이 늘어날수록 대가는 커졌고, 권씨의 부담도 가중됐다. 현금 수백만원을 감사의 표시로 제공했던 권씨는 오씨로부터 2007년 3월 김 전 총장이 전세자금 4억, 5억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거액이 없는 권씨에게 김 전 총장은 오씨를 통해 돈을 빌릴 업체까지 소개했고, 결국 권씨는 홈쇼핑 E사 사장으로부터 돈을 빌려 김 전 총장에게 4억2,000만원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관계자는 "방송위가 가진 방송국 인허가권, 프로그램 심의권, 제재조치권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케이블방송사들이 어쩔 수 없이 김 전 총장의 요구를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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