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놀라운 맛이네요. 우리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팔면 어때요?”
1981년 일본 도쿄 한 한국인 가정 응접실. ‘꼴딱 꼴딱’침 넘어가는 소리와 ‘딸깍 딸깍’ 젓가락질하는 소리가 쉴새없이 공간을 울린다. 신주쿠에 위치한 게이오백화점 직원 10여명은 당시 여성복 매장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던 오영석(59)씨의 막내 아들 돌잔치에 초대받았다. 김치, 파전, 제육보쌈 등 한국식 가정요리가 그득한 상을 처음 접한 이들은 식사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일본 ‘김치왕’이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오영석 (주)영명 대표는 한식 전문점 ‘처가방’을 브랜드로 해 일본 전역에 한식당 23곳과 일본 유명 백화점에 식품코너 17곳을 운영하고 있다. 연 매출 500억원, 종업원 수는 600여명에 달한다.
영남대 화학과를 다니다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상경했다. 6년 간 의상실을 운영하며 결혼하고 딸까지 둘을 낳았지만 패션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일본 문화복장학원에서 패션 유통을 전공했는데 패션업보다 유통업에 더 끌려 게이오백화점에 취직했다”고 했다.
단초는 막내 아들이 제공했지만, 성공의 첫 걸음은 동갑내기 부인 유향희씨가 이끌었다. 유씨는 93년 도쿄 요츠야에 김치 젓갈 등을 파는 반찬가게를 열었다. 일본식 기무치나 일본인 입맛에 맞춘 퓨전 김치가 아닌 정통 한국 김치로 승부했다. 생소한 맛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일본인도 차츰 그 맛에 빠지기 시작했고 부부는 5개월 만에 게이오백화점에까지 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화점 입점 후 이 ‘겁없는 부부’ 한테도 시련이 닥쳤다. 바로 옆 만두가게 주인이 마늘냄새가 싫다며 매일 거칠게 항의했고, 다른 백화점 식품부에선 ‘김치가 썩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깍두기에 맛을 내려고 넣었던 양파즙이 발효돼 거품이 난 것인데 부패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경영수완을 발휘했다. 96년 12월 요쓰야가게를 확장해 가정요리 전문점인 ‘처가방’ 한식당을 개업한 것이다. 그가 게이오백화점을 사직하고 외식사업가로 변신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발효시기 등 김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김치의 특성을 과학적으로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인근에 김치박물관을 만들었다.
1호점 개업 두 달 만에 거짓말처럼 행운이 찾아왔다. 김치박물관에 흥미를 느낀 아사히TV가 도쿄의 가볼 만한 맛집으로 ‘처가방’을 소개했다. 하루 5만엔 대 매출이 고작이던 가게는 방송이 나간 후 하루 평균 100만엔 대 매출을 기록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마침 국내 드라마가 일으킨 한류열풍,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일본 내 한국 김치에 대한 인식도 크게 향상됐다.
제10차 세계한상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오 대표는 수익의 일정 부분은 기부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실제 3월 대지진 때 직원들과 함께 350만엔을 모금해 기탁했을 뿐 아니라 회사 직원 및 국내 학생 30명에게 매달 1억5,000만원의 장학금을 주고 있다.
강성명기자 sm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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