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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사람/ 비밀의 英왕실 법률안 거부권… 정치개입 떠들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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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사람/ 비밀의 英왕실 법률안 거부권… 정치개입 떠들썩

입력
2011.11.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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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Kings rein but do not govern)

입헌군주제의 오랜 전통을 확립한 영국의 정치체제를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말이다. 영국 왕실은 18세기 의회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이후 국가통합과 존경의 상징으로 존재할 뿐, 일절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영국 사회가 왕실의 정치개입 논란으로 시끄럽다. 무려 700년 가까이 특정 왕족에게 법률안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국민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찰스 왕세자이기에 더욱 그렇다.

법률 확정하려면 왕세자 동의 구해야

영국 일간 가디언은 2005년 이후 정부부처 관계자와 찰세 왕세자 측이 주고받은 17건의 서신을 공개했다. 대부분 의회가 마련한 법률안 초안에 대해 왕세자의 동의를 구하는 내용인데, 법안이 왕세자의 사적 이익, 특히 그가 거느린 콘월 영지의 재산권을 침해하는지 여부가 쟁점이다. 앤드루스 가족공동체부 장관은 서신에서 “건축법 변경안을 웨일스공(찰스)이 허락하신다면 공을 대신해 개정법을 시행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바뀐 법조항들은 여왕폐하와 왕세자의 사유재산에도 동등하게 적용되므로 반드시 동의가 필요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찰스 왕세자에게 검토를 요청한 법안은 다양하다. 도로안전부터 도박, 2012년 런던올림픽, 자선ㆍ기부, 의회기록 열람 등 온갖 내용이 망라돼 있다. 해군 내비게이션 설치 규정을 언급한 서신도 있다.

이런 사실이 폭로되자 법률 거부권의 실체를 투명하게 밝히라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정부와 왕실 모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 동안 왕세자의 동의를 거친 법안이 얼마나 되는지, 실제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가 있는지 등은 알 길이 없다. 왕세자 측 대변인은 “왕실과 정부 사이에 오간 대화는 관례적으로 비밀에 부쳐진다”며 “다만 왕실 소유지에 일부 예외 조항이 있으나 법안이 확정되면 이런 권리는 소멸된다”고 해명했다.

700년간 이어진 특권

법률 거부권의 기원은 700년 전인 13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에드워드3세 국왕은 제1 왕위계승자에게 ‘웨일스공’의 칭호를 내리며 콘월 인근에 550㎢ 규모의 영지를 하사했다. 이 때 왕세자의 재산권을 보장할 목적으로 콘월 영지와 관계된 법안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권한을 덤으로 줬다. 지금도 왕세자의 수입은 주로 콘월 영지에서 나온다. 영지의 가치는 1조2,400억원에 달하고, 찰스 왕세자는 지난해에만 332억여원의 지대 수입을 올렸다.

문제는 법률 거부권이 아무리 관습헌법처럼 전해내려 왔다고 해도 지나친 특권이 아니냐는 것이다. 영국 여왕도 모든 법안에 대해 승인권이 있으나 어디까지나 왕실 대표자로서 행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반면 왕세자의 거부권은 법안 확정 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위법의 소지가 다분하다. 한 의회 변호인은 “이 권한은 핵폭탄의 버튼과 같다. 아무도 누르지 않을 것이란 점을 잘 알지만 그 자체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군주제 폐지 탄력받나

가뜩이나 찰스 왕세자는 그간 숱한 정치개입 의혹으로 구설에 휘말렸다. 3월 자신이 운영하는 자선단체가 사업과 관련한 부가가치세를 인하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고, 지난해에는 정부 자문기구를 통해 런던 재래시장의 재개발 건을 막도록 압력을 가했다. 2001년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당시 토니 블레어 총리를 비롯한 대법관들에게 개정 인권법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찰스 왕세자의 이력에 법률 거부권 논란이 더해져 군주제 폐지 주장은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왕실은 최근 폐막한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왕위 계승시 왕자에게 우선권을 주는 규정을 변경하기로 하는 등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군주제 폐지 단체인 리퍼블릭의 그레이엄 스미스 책임자는 “찰스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권한을 지렛대로 각료들을 길들여 왔다”며 “영국 헌법이 기본적으로 반민주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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