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서울의 한 주택가. 학교에 간 아이들이 떠난 적막한 골목을 초등학생 은재(11ㆍ가명)가 멍한 표정으로 서성였다. 심한 '왕따(집단따돌림)'후유증으로 학교에 제대로 가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째. 동네 어른들이 "왜 학교 안 갔냐"고 묻는 게 싫어 어떤 날은 약 56㎡(17평) 월셋방에만 박혀 지낸다. 먹고 살기 빠듯한 부모가 출근하고 나면 은재는 홀로 옆 동네 산책을 하거나, 인터넷과 게임에 골몰하며 외로움을 잊는다. "저는 상관없어요"하고 말하지만 마음 속 응어리를 눌러 담는 게 버릇이 된 듯한 여린 목소리다.
담임교사 폭행 알고도 축소
은재가 학교를 무서워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여름이다. 같은 반 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것. 처음 엄마 A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담임선생님이 가해학생들을 면담해 상황을 파악하고도 '장난치다 작은 사고가 있었다'고만 하셨어요. 아이도 부끄러운지 말을 못했는데, 가해 학생들이 자신들이 한 극심한 가혹행위를 교실에서 소문을 냈더군요." 그 해 가을에서야 다른 학부모 입을 통해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당시 분노를 잊지 못하고 울분을 삭였다.
학교의 무관심 속에 집단 따돌림은 더욱 심각해졌다. 같은 해 10월 똑같은 가해학생들에게 다시 전신에 멍이 들도록 폭행당했다. 두 차례 가혹행위의 전말을 알게 된 A씨가 학교에 항의했지만 학교장이 가해학생과 피해학생 학부모의 합의를 권했고, A씨의 거듭된 항의에 정식으로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열린 것은 다시 한달이 지난 11월이었다.
학교 외면 속 커진 마음의 병
자치위 과정에서 A씨는 또 한번 좌절했다. A씨는 학교가 관리소홀에 대해 사과하고 가해학생을 처벌토록 요구했으나, 학교장을 위원장으로 한 자치위가 내놓은 대책은 가해학부모의 합의금, 학생 반성편지, 담임교사의 관찰과 상담안내뿐이었다. A씨가 추가 대책을 요구하자 학교는 끝내 가정통신문을 통해 '자치위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A씨는 "사건을 감추고 덮어서 병을 키운 학교가 사과도 없이 늘 하는 담임의 관찰을 대책이라고 내놓았으니, 이런 학교에 어떻게 아이를 맡길 수 있겠느냐"고 했다.
누구 하나 돕지 않는 사이 은재는 신경정신과에서 적응장애,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대인기피증 판정을 받았다. 매달 수 십 만원 치료비는 고스란히 차상위계층인 은재 가족의 몫이 됐다. 답답해진 A씨는 결국 경찰 신고를 택했지만 가해학생이 미성년자라 약식재판에서 단 1명의 가해학생만이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평판 우려해 쉬쉬하는 학교
3일로 학생의 날이 82주년을 맞았지만, 은재처럼 너무나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 내몰리는 아이들이 적지않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초중고교 학업 중단자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6만1,893명이 부적응, 불화, 학업부진 등을 이유로 학교를 떠났다.
학교의 무관심과 무대책은 문제를 키운다. 평판을 우려하는 학교는 각종 교내 사고와 분쟁을 덮는데 급급한 경우가 허다하다. 자치위 개최 자체에 소극적이고, 형식적 절차를 거치고 나서도 가급적 사태를 축소한다. 지난해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초중고생 3,560명을 조사한 결과, 폭력 가해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학생이 41%에 달했다.
A씨는 급한 마음에 전학, 대안학교 진학 등을 고려하고 있지만 지인의 배려로 월 20만원 월셋방에 머무르는 형편이어서 이조차 쉽지 않다. 그는 "아이가 학교에 가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학교 근처에 가면 '무섭다. 천국에나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며 눈물을 쏟았다. 관련문의 청소년폭력예방재단 (02)585-0098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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