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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600만명 시대/ <상> 청년부터 노인까지 '비정규직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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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600만명 시대/ <상> 청년부터 노인까지 '비정규직 인생'

입력
2011.11.0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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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취업난에 정규직은 언감생심…

비정규직 600만 시대.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특정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녀노소, 학력, 직종을 따지지 않고 모두가 겪어야 하는 천형(天刑)이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 599만5,000명 중 대졸 학력 이상자가 30%, 50대 이상이 35%가 넘는다. 취업난으로 비정규직에 몸담아 아르바이트 인생을 전전하는 20대, 고학력인데도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30, 40대, 퇴직 후 재취업했으나 비정규직 자리 밖에 못찾는 50, 60대에게 현실의 괴로움만 있을 뿐 앞날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맥잡' 전전하는 20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아르바이트하고 학자금 대출 받으며 높은 등록금을 감당해야 했던 20대. 이들은 졸업 후 심각한 취업난 탓에 비정규직이라도 우선 자리를 잡고 보는 경우가 많다.

서울 성북구의 보습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이민호(28ㆍ가명)씨는 말 안 듣는 학생이 있어도 혼내지 못한다. 며칠 전 떠드는 학생을 혼냈다가 원장으로부터 "그럴 거면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2년 전 4년제 대학 통계학과를 졸업했지만 취업이 쉽지 않아 이 길을 택했다. 하루 7시간 넘게 일하지만 박씨 월급은 120만원 남짓. 시급으로 치면 3,000원이 조금 넘는다. 박씨는"신분이 불안해 학생 눈치까지 봐야 한다"며 허탈해했다.

방송국에서 비정규직 조연출로 일하는 송혜연(24ㆍ가명)씨는 사실상 아르바이트 인생을 산다. 스케줄 관리, 작가 보조 업무, 섭외 등을 담당하는 그의 월급은 고작 90만원 정도. 4대 보험은 물론 휴일 근무나 야근이 잦아도 초과수당도 없다. 송씨는 "똑같이 야근해도 정규직은 휴가나 수당으로 보상 받는다"며 "월급이라도 현실화됐으면 좋으련만… "이라고 한탄했다.

자동차정비업체 사무직 1년차인 정은영(26ㆍ가명)씨는 비정규직인 자신을 "잘하면 본전, 못하면 잘리는 신세"라고 했다. 1년 후 있을 정직원 평가를 빌미로 실적이 안 좋을 때마다 주변에서 "잘해야 정직원 전환이 되지"라며 겁을 준다는 것. 정씨는 "상여금 등 복지 혜택에서 소외될 때보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나를 볼 때 가장 서럽다"고 토로했다.

고학력 비정규직 30, 40대

왕성한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30-40대. 하지만 고학력 비정규직도 많고,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 한다.

송선아(30ㆍ가명)씨는 임용고시에 번번이 미끄러지다 결국 대전의 한 사립고 기간제 교사 직을 택했다. 1년마다 재계약해야 하는 신분인 그는 치열한 기간제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대학원까지 다니며 스펙을 쌓았지만 학기말만 다가오면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그는 "정규 교사의 꿈은 접었지만 공무원 연금가입도 안 되고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고 말했다.

공기업 홍보팀 편집디자이너인 김주희(35ㆍ가명)씨는 석사 학위를 따고 박사 과정을 수료한 고학력자지만 계약직 신분이다. 김씨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 갑갑하다"며 "못 배운 것도 아닌데 후배로 들어오는 다른 직군 정규직에게 선배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도 속상하다"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1년 6개월 넘게 일한 이상현(32ㆍ가명)씨에겐 정규직과의 차별대우가 가장 큰 고통이었다. 같은 일을 하지만 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임금도 20~30% 많이 받고 경조사비나 보너스 등의 복지혜택을 누렸던 것. 그는 "6년 간 직장을 3군데 다녔는데 정규직과의 차별 때문에 지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재취업 50, 60대

서울 서대문구에서 주차관리요원으로 일하는 임준상(54)씨는 1주일 뒤면 실직자가 된다. 25년 가까이 개인용달차를 몰다 불황으로 수입이 떨어지자 2년 전부터 주차관리요원으로 일해왔지만 지난달 재계약 불가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주일에 62시간 근무하고, 끼니도 대충 때우며 150만원 받고 일했는데 이렇게 잘리니 허무하다"며 "노가다라도 해야 먹고 살 텐데 나이든 사람 받아주기나 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씨는 등록금 때문에 세 학기 연속 휴학했던 대학생 아들 걱정에 눈물을 지었다.

'사오정(45세 정년)'이란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명예퇴직 시기는 빨라졌지만 과거와 달리 늦게 결혼하고 자식도 늦게 낳는 까닭에 오히려 퇴직 후 들어가야 할 돈이 많다. 하지만 자영업으로 성공하긴 쉽지 않고 정규직으로 재취업하는 일은 50, 60대에겐 하늘의 별따기인지라 몸 고생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기업 간부였?손재학(54ㆍ가명)씨는 2년 전 해고 통보를 받고 지금은 경기 화성시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손씨는 "정규직 일자리는 찾을 수 없고 퇴직금을 투자해 시작한 사업까지 망했다"며 "대기업 이사까지 지냈던 내가 지금은 월 110만원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4년 전까지 금융회사에 다니다가 퇴직한 송영준(55ㆍ가명)씨는 지금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다. 퇴직 후 호프집을 운영하다가 망해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쉽지 않았다. 송씨는 "4,000원이 조금 넘는 시급으론 대학생 아들 학비는커녕 생계유지도 힘들다"며 "급격한 신분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 한국 비정규직의 특징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 셋 중 하나(34.2%)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은 극히 열악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의 비중도 크고 임금격차도 심하고 일자리의 질도 낮으며 비자발적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의 임시직(기간제ㆍ계약직 등) 비율은 21.3%로 폴란드,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어 OECD 26개국 중 4위다. 임금 격차도 심각하다. 연구소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 2명 중 1명이 저임금계층(중위임금 3분의2 미만)이고 정규직은 13명 중 1명이 저임금계층이다. 정규직의 1.5%만이 법정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월급을 받지만 비정규직은 23%(2011)나 된다. 사회보험이나 수당 등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정규직의 건강보험 가입률은 98.8%이지만 비정규직은 36.9%에 불과하다. 주5일제 비율은 67.6%(정규직)와 32.5%(비정규직), 상여금을 받는 비율은 96.3%(정규직)와 32.3%(비정규직)로 차이가 크다. 시간외수당, 유급휴가 등 각종 복지제도의 혜택도 2~3배 차이가 난다.

외주화의 전형적 형태인 사내하청(하도급)의 비중이 높은 것도 우리나라 비정규직 노동시장의 특징이다. 특히 대기업의 사내하청 남용이 심각한데 2008년 300인 이상 사업체 중 사내하청을 활용하는 업체는 54.6% 였다. 전문가들은 전통적인 제조업뿐 아니라 최근에는 생명을 다루는 간호ㆍ간병ㆍ요양 등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사내하청이 급증하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300인 이상 병원의 경우 82%가 사내하청을 쓰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들을 하청업체에 직접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로 간주, 비정규직 통계에서 제외하고 있다. 노동계에서 주장하는 비정규직노동자(830만)와 정부통계(600만)의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제조업과 서비스업, 공공과 민간, 핵심업무와 주변업무를 막론하고 사내하청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는 것이 문제"라며 "사내하청, 파견 등 간접고용을 규제하는 것이 우리나라 비정규직 문제해결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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