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이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는 국민의 신뢰다. 그 이상은 없다."
공영방송 수장의 바람직한 모델로 꼽혀온 그렉 다이크 전 BBC 사장은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신뢰(trust)'를 강조했다. 1일 방송문화진흥회 주최로 열린 국제방송포럼(Trend&Issue in MediaㆍTIM) 참석차 방한한 다이크 사장을 포럼 전 따로 만났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BBC 사장으로 재직한 그는 이라크전 참전 명분을 만들기 위해 BBC를 압박한 토니 블레어 정부에 반기를 들며 편집권을 방어했고, 방만한 재정 등을 손보며 BBC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12월 종합편성(종편)채널 출범과 인터넷 방송 등 다매체 환경에서 정치중립성 논란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 공영방송의 나아갈 길을 들어봤다.
-미디어, 특히 공영방송의 공공성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나.
"모든 정부와 모든 정치인은 언론에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한다. 문제는 언론이 그것을 가감 없이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방송사는 외압에 맞서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 BBC 사장 재임 당시 BBC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관해 많은 토론을 했는데, 결론은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방송을 하자는 것이었다."
-BBC 재임 당시 강력한 독립언론을 표방했는데.
"독립적 언론은 세 가지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즉 기자가 불편부당하고(impartial), 지적이고(intelligent), 용기있는(brave) 자세를 갖고 정부의 시각이 아닌 공정한 관점에서 취재하고 보도하는 걸 말한다."
그는 2003년 5월 BBC 기자 앤드루 길리건이 블레어 정부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존재 정보를 윤색해 이라크전 참전의 명분으로 이용했다고 폭로한 것이 정부와 BBC의 진실공방으로 번지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정부가 일부 정보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권력에 맞선 공영방송의 수호자로 부상했다. 노동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다이크는 BBC 취임 당시 블레어와의 유착관계를 의심받기도 했으나 정권과 각을 세우고 BBC를 지켜내 퇴임 이후 더 존경 받는 리더가 됐다.
-공영방송 경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정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적 부담은 늘 있다. 언론 매체가 많아지면서 재원문제도 압박 요인이 되고 있다. 기자 인력 축소 등으로 보도의 영역이 줄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공영방송 KBS가 수신료 인상과 관련해 민주당 대표실을 도청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영국에서 루퍼드 머독(소유 신문사들)에 의한 도청 사건이 있었다. 당시 소규모 도청이라고 알려졌으나 4,5년 후 광범위하게 도청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문이 일었다. KBS의 경우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폭로해야 할 기사가 있어서 했다면 모를까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도청은 거의 용인되지 않는다." (다이크 사장은 "경찰은 뭐라고 하나" "다른 언론에서 이 문제를 계속 취재하고 있나" 등 질문을 쏟아내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공영방송을 비롯한 방송사들의 뉴스가 공정성에서 비판을 받으며 인터넷 방송 등 대안언론이 뜨고 있다.
"공영방송이 국민을 위한 공정한 방송이라는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BBC의 경우 영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공영방송으로서의 신뢰를 얻고 있다. "
-BBC 사장은 어떻게 선임되며 수신료는 어떻게 운용되나.
"사장은 15명으로 구성된 BBC 이사회에서 선임되는데, 정치인들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최근 20년간 사장이 세 번만 바뀌었을 정도다. 재원은 100% 수신료로 충당돼 사실 상업성에 휘둘릴 여지도 적다."
-BBC 사장 재임 시 유일한 목표가 편집권 방어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밝혔는데, 한국의 방송사 경영진에게 조언을 하자면.
"누가 집권을 하든지 방송을 손에 넣고 싶어한다. 영국의 경우 신문은 좌파와 우파 성향이 분명히 나뉘어진 모습인데 방송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층에서 방송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심이 더 많은 것 같다. 방송사 경영진은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내가 BBC에 있을 때 정치적 성향이 너무 극렬한 직원 두 명이 권고를 받고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미디어 빅뱅 시대를 맞은 한국 방송사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은.
"공영방송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면, 그 신뢰를 회복하는 게 먼저다. 돌이켜 보면 블레어 정부가 은폐하고 축소한 사실이 결국 다 드러나지 않았나. 진실은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밝혀진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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