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우상으로 추앙 받던 김우중 대우그룹회장과 12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 계열사 사장 13명이 1999년 11월 1일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 회장의 세계 경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재계 자산순위 2위, 매출액 4위를 기록하던 거함 대우가 침몰한 것은 그룹 총수였던 김 회장의 즉흥적이고 무모란 사업확장과 1인 지배체제에서 오는 불안정성, IMF사태로 인한 기업의 새로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 등이 가장 큰 이유였다.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경기중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후 67년 서울 충무로에서 단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승승장구하던 대우는 70년대 다른 대기업들이 진출하기 꺼려했던 동유럽과 베트남 등에 진출하며 해외사업에 큰 성공을 거뒀고 주력 사업이던 대우차는 폴란드, 루마니아, 인도, 중앙아시아 등에 사업을 확대하며 세계 10대 자동차업체 중 하나로 성장했다. 자동차를 비롯해 건설, 조선, 증권, 전자 등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던 대우그룹은 97년 말 한국을 강타한 금융위기 속에서도 쌍용차를 인수하는 등 공격 경영을 늦추지 않았다.
가장 많은 해외 법인을 가졌던 대우는 99년 3월 그룹의 부채비율이 500%를 넘어섰고 자기자본비율은 50% 이하로 떨어졌다. 차입의존도가 높아 IMF사태가 초래한 연 20%대의 고금리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같은 해 8월 70억 달러의 부채상환 연기와 함께 워크아웃이 결정된 대우그룹은 결국 11월 1일 채권단의 요구로 인해 김 회장과 사장단이 총 사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뗀 뒤 검찰 수사를 피해 해외로 도피해 잠적했던 김 회장은 오랜 유랑생활을 끝내고 2005년 입국해 분식 회계와 사기 대출 등의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항소를 포기하고 형이 확정된 그는 2007년 12월 31일 특별 사면됐고 지난 해 3월 그룹 창립 44주년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 합창단의 노래 '우리는'을 들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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