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낮 서울 서초구 방배동 서초구립 방배유스센터에선'비타민'을 주제로 한 이색 행사가 열렸다. 흔히 섭취하는 비타민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비속어를 타파하는 청소년 민주시민'의 준말이다. 한마디로 언어순화 프로그램이다.
강사로 나선 최지혜씨가 프로그램에 참가한 서울 서문여고 1학년 9반 학생 38명에게 물었다. "'ㅅㅂ' 'ㅈㄴ' 'ㅈㄹ'... 초성만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무엇인가요?" "시X이요, 지X이요." 몇몇 학생들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른 학생들은 욕과 비속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으나, 차마 말 못하겠다는 듯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그렇다면 방금 나온 욕과 비속어의 본래 뜻을 알아보죠." 최씨의 본격적인 설명과 함께 프로그램은 시작됐다.
최씨와 같은 '비타민' 프로그램 강사는 센터 소속 2명과 자원봉사 대학생강사 3명 등 모두 5명. 이들이 의기투합한 계기는 단순하다. 심각해지고 있는 청소년 언어문화를 바로 잡아보자며 올해 초 뭉쳤다. 여성가족부의 '청소년 언어사용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청소년의 73.4%가 매일 욕설을 할 만큼 비속어 남용은 위험수준이다.
이들은 활동을 위해 국립국어원 교수를 초빙해 사전교육까지 받았다.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저도 중고교 시절 욕과 비속어를 사용해야만 친밀감이 더 높아지는 것으로 착각했어요. 나중엔 습관이 돼서 고치는데 꽤 오랫동안 애를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중고교생들이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대학생강사 중 한 명인 김동석(평택대 청소년복지학3)씨 말이다.
'비타민'은 올해 여성부에 의해 우수 공모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여성부에 지원을 요청한 390여 개 청소년프로그램 중 선발된 60여 개 프로그램 중 하나일 정도로 필요성과 아이디어가 돋보인다는 평가다.
고형복 방배유스센터 관장은 "청소년 언어순화와 관련한 교육이 체계화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비타민' 프로그램은 단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비타민'프로그램은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지역 학교를 대상으로 이뤄지지만, 지난달엔 입 소문을 통해 요청이 온 전남 함평 학다리고에서 진행됐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강사들의 몸은 고되도 보람은 배가 됐다. 강사 신재이씨는 "2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했는데, 1학년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시간이 되면 반드시 다시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서문여고 '비타민' 프로그램은 3시간 가량 진행됐다. 청소년들이 주로 쓰는 욕과 비속어 종류와 뜻을 알아보는 강의에서부터 비속어를 남발하지 말자는 문구가 들어간 공익광고, 욕 방지용 책갈피 만들기 등 체험학습으로 꾸며졌다.
처음엔 주저하던 학생들은 친구 말에 깊이 상처받았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했던 일, 대수롭지 않게 한 말에 친구가 상처 받은 일 등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최유희양은 "학교수업 대신 듣는 거라 처음엔 시간만 때우다 가려고 했다가 무심코 우리가 쓰고 있는 비속어 속뜻을 알고, 얼굴이 화끈거렸다"며 "앞으로 예쁘고 고운 말을 쓰기로 친구들과 다짐했다"고 전했다.
'비타민' 프로그램의 목표는 뚜렷하다. 청소년들이 곱고 바른 말을 쓰는 게 옳다는 생각을 스스로 갖게하는 것이다. "모든 청소년들이 'ㅅㅂ' 초성을 들으면 '수박' 같은 낱말을 가장 먼저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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