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타계한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교육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한 시대 재계를 주름잡았던 재벌 총수의 삶의 궤적을 조금만 따라가보면 이유를 간파하기란 어렵지 않다. 호암은 부모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로 유학을 갔지만 심한 각기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선진 학문을 배워 국가발전에 일조하겠다는 20대 초반 젊은이의 야망이 꺾인 것이다. 당사자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부를 축적해가는 과정에서도 틈만 나면 교육의 중차대함을 비서진에게 내비쳤다고 한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교육이 제대로 돼야 하고, 기업이 일정 역할을 해야 한다"는 호암의 교육 철학은 진행형이다.
서울 강남의 끄트머리에 있는 중동중ㆍ고 재단을 삼성이 인수했을때는 이학교 출신 호암은 세상에 없었다. 타계 7년이 지난 94년에 삼성이 경영을 맡았기 때문이다. 당시 재벌의 학교 운영을 놓고 교육의 기업 종속 따위의 몇가지 논란이 있긴 했어도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성을 끌고가게 된 이건희 회장은 생전 창업주의 유별난'교육 입국'의지를 실천으로 옮겼다. 중동고 인수 2년 뒤, 재정 부실에 시달리던 성균관대를 가져온 것 역시 교육을 통해 미래를 담보해야 한다는 호암의 의중이 반영된 측면이 크다.
중동고의 비극, 자율고의 허상
삼성이 주인이 된 성균관대의 발전상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재정과 열정이 절묘하게 투입된 결과는 다른 대학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고, 시비가 여전하긴 해도 재벌의 대학 경영 참여 바람을 일으켰다.
사실 교육의 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중등교육이 고등교육 보다 훨씬 중요하다. 인성과 지식을 축적해가는 시발점이 중등교육인 탓일 것이다. 삼성의 중동고 인수가 그래서 더욱 가치 상승 작용을 낳았다는 부분은 부인키 어려운 팩트다.
그런데 삼성이 자율형사립고(자율고) 체제인 중동고 운영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17년 동안 804억원을 투자해 숱한 성과를 내면서 명문 사학의 토대를 착실히 다지고 있는 시점에, 더는 학교를 운영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국의 이튼 스쿨을 만들겠다"는 이 회장이 스스로 꿈을 접었다.
누가, 무엇이, 선친의 DNA를 가장 많이 물려 받았다는 이 회장을 좌절시켰을까. "한국의 중동에서 세계의 중동이 됐으면 좋겠다"는 호암의 유지를 이 회장은 무슨 이유 때문에 지키기를 포기한 것일까.
나는 MB 정부가 2009년 자율고란 검증 안 된 제도를 들이밀때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자율'이라는 명사가 첨부됐다면 학생을 뽑는 절차에서부터 등록금 결정까지 운영과 관련된 부분들은 학교쪽에 맡기는 게 정석 아닌가. 그런데도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다른 사다리를 고집했다. 학생선발, 커리큘럼 같은 핵심은 죄다 규제하면서 '자율'고를 떠들어댔다. 무늬만 자율고인 상황에서 중동고 운영은 의미가 없다고 이 회장은 봤던 것이다.
선친이 졸업하고 끔찍하게 아꼈던 학교의 운영을 포기하기까지 이 회장의 고충은 컸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겠다는 판단이다. 정부가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암초가 돼 있는 현실을 벗어날 방법은 그것 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제도 개선이 유일한 해결책
삼성의 중동고 철수는 자율고 몰락의 신호탄으로 여겨진다. 대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다른 자율고들도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일반 사학 법인들의 인식 또한 대동소이하다. 지난해 서울 지역 26곳의 자율고 중 9곳이 무더기로 미달했고, 학교 쪽에선 "이건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지만 교육 수장은 요지부동이다.
자율고는 기로에 서 있다. 자율과 경쟁의 모토 아래 평준화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출발한 자율고 제도를 이 대로 유지해선 안 되는 지경이 됐다. 불편한 교육정책을 손질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국민을 기만하는 짓이다. 이건희 회장의 눈물은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김진각 여론독자부장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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