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시제를 지내러 고향에 갔다. 문경 땅에서 산세가 가장 약한 영순 말응에서 제법 산세가 험한 천주산(836fm) 중턱까지 고루 흩어진 산소에 간단히 주과포(酒果脯)를 올렸다. 종일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렸지만 단풍 철의 끝 자락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을 가로막진 못했다. 온천과 촬영장, 역사유적과 관광식당 등이 가까이 몰려있는 문경새재도립공원 쪽은 저녁 어스름이 내린 뒤에도 북적거렸다. 주흘산(1,106fm) 조령산(1,026fm) 백화산(1,064fm) 등 주변 명산을 타고 내려온 발길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 모처럼 청량한 공기는 잔뜩 들이켰지만, 눈가는 데마다 솟은 산에 오를 생각은 이번에도 못했다. 다친 발목이 도질까 봐 엄두를 내지 못한 지 벌써 몇 해다. 이런 후천성 '산치(山痴)'도 안나푸르나(Annapurna)라는 이름에는 공연히 가슴이 뛴다. 올라본 고향의 몇 안 되는 산 가운데 조령산의 깔끔한 능선이 유독 인상적이었고, 그 정상에 한국 여성 산악인의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한 고(故) 지현옥의 추모팻말이 서 있고, 그가 빛나는 기록을 뒤로 하고 37년의 짧은 생을 안나푸르나에 묻었다는 가는 인연을 더듬은 결과일까.
■ 세계 10번째로 높은 안나푸르나 1봉(8,091fm) 외에 7,000fm 이상 연봉을 열 셋이나 안고 있는 안나푸르나는 일찍부터'죽음의 산'으로 통했다. 해발 8,000fm 이상의 산 가운데 오랫동안 사망률(사망자/정상 등반자) 최악의 산이었고, 1990년 칸첸중가에 그 자리를 내준 뒤에도 사망자 숫자는 늘 가장 많았다. 안나푸르나가 산스크리트어로'가득한 음식'을 뜻하고, '수확의 여신'또는 '풍요의 여신'을 뜻하는 것과는 딴판이다. 힌두교에서는 기아의 공포에서 건져주는 '부엌의 여신'이니, 지독한 반어법이다.
■ 세계 최초로 8,000fm급 16좌 완등 기록을 낳은 엄홍길에게도 안나푸르나는 특별했다. 네 번 실패 끝에 겨우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그는 자서전 에서 뼈가 어긋나 동강났던 네 번째 실패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고통을 참지 못해 머리를 감싸고 발버둥쳤다. 제발 살려달라고, 살아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먼저 간 동료들의 맺힌 한을 풀게 해 달라고, 안나푸르나의 신을 향해 울부짖었다.'영원한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끝내 안나푸르나의 품에 안겼고, 그가 빛낸 불굴의 도전 의지는 히말라야 하늘의 별로 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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