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명
넓은 것이 내 앞에 떨어지네넓은 것이 걷는 내 두 발을 덮네넓은 것은 하늘 바다 들판또 강변 모래밭 무령왕릉 금잔디연못 속 잊혀진 내전內殿의 그림자그 흔들리는 침묵 그리고홀로 서쪽으로 가는 마음, 빈터넓은 것이 내 앞을 쓸고 있네넓은 것이 슬픔도 없이 자꾸 퍼지네넓은 것이 내려앉는 내 마음나뭇잎 발자국 반나마 찼네넓은 나뭇잎 위에 넓은 나뭇잎으로천수백 년 전부터 넓은 것이발자국이 그런 것이
● 출판사로부터 전체메일을 받고는 나열된 인터넷 아이디를 눈여겨 볼 때가 있어요. 한번은 ‘무우수’라는 아이디가 눈에 띄는 거예요. 마야부인은 룸비니 숲에서 아름다운 나무의 가지를 잡고 석가모니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 나무의 이름은 무우수(無憂樹), 그러니까 근심이 없는 나무라고 하네요. 이런 멋진 아이디의 주인이 누굴까 참 궁금했더랬는데 알고 보니 라는 시집을 낸 이진명 시인이었습니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슬픔이 넓게 퍼져가는 마음을 가졌나 봅니다. 그 마음에는 연못 속 잊혀진 내전의 그림자처럼 어떤 고통이 아른거립니다. 그 내전에 사시는 왕비님이 살며시 걸어 나와 또 한번의 지독한 산고 속에서 어느 근심 없는 한 마음을 낳으시겠군요. 그러시라고 넓은 나뭇잎들이 슬픔도 없이 떨어지며 시인의 마음을 쓸고 또 쓸어줍니다. 저도 모처럼 시인의 첫 시집을 다시 펼치며 번잡한 마음을 쓸어 봅니다.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