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들어와 왜 젊은이들이 분개할 일이 많은데도 침묵하고 있는지 의아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서중석(사진) 성균관대 교수는 최근 펴낸 <6월 항쟁> 서문에서 '수십 년 싸워서 얻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남북화해와 평화가 너무 쉽게 훼손되고 후퇴하는데, 정치인도 젊은이들도 그저 바라만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며 이렇게 썼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문민 정부와 민주주의 실현의 단초를 마련한 1987년 6월 항쟁을 20년도 더 지나 새삼 되짚어본 이유다.
서 교수는 이 책에서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해 6ㆍ29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시간대별로 꼼꼼히 정리하고 이 사건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지금까지 6월 항쟁의 과정을 소개하거나 현대사적 의미를 분석한 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가 민주화운동 쪽 자료에 의존해 민주화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들이었다.
<6월 항쟁>은 이 같은 자료와 함께 당시 권력의 움직임을 잘 보여주는 <전두환 육성 증언> (김성익 편저) <노태우 육성 회고록> (조갑제 편저) 같은 자료까지 적극 활용해 6월 항쟁의 배경이나 전개과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노태우> 전두환>
저자는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호헌철폐투쟁은 중시하면서도 전두환의 4ㆍ13 호헌 조치가 갖는 중요성은 간과'하거나 '마찬가지로 6ㆍ29 선언이 있게 된 것은 군이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을 단순하게 사고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처음부터 개헌을 원치 않았던 전두환이 4월 13일 이를 발표한 것은 그보다 며칠 앞서 김영삼ㆍ김대중이 신당 창당을 선언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거기에 양 김의 직선제 개헌 주장에 거리를 두는 미국이 호헌에 강력히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오판'도 한몫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갈수록 시위가 격화하면서 경찰이 무장해제 당하거나 파출소, 민정당사, 방송사 등이 공격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결국 '자신들의 존립 의의를 강력한 치안 확보에서 찾'는 군부독재정권은 군을 출동시키거나 국민의 요구에 굴복해야 하는 양자택일에 내몰렸다. 하지만 계엄령 같은 비상조치는 '군도, 노태우를 비롯한 민정당 간부도 원치 않았'고 10ㆍ26의 전개를 누구보다 잘 알고 12ㆍ12, 5ㆍ17 쿠데타를 지휘했던 전두환 역시 기피했다고 한다.
서 교수는 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ㆍ비폭력 논쟁에도 주목했다. 3ㆍ1운동에서도 이 같은 논쟁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며 그는 단순히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보다는 '얼마나 철저히 싸우려 했는가'가 투쟁 방식을 정하고 그 정당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준거가 돼야 한고 강조한다. 6월 항쟁은 비폭력으로 일관하지 않고 폭력을 동반했기 때문에, 1980년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역동성이 생겨났다는 해석이다.
서 교수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서울역 앞 고가도로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 때 6월을 무리 지어 공동선을 추구한 '벅찬 감동과 감격'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자기다짐이라도 하듯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토록 힘들여 바꾸어놓은 세상이 변하더라도, 또 공동체를 모래알처럼 흐트러지게 하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하더라도 굳건히 제 갈 길을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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