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일이다.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동성친구들을 훨씬 잘 사귄다. 즉 한국인보다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외국 여성과 쉽게 친해진다.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해서는 결코 아니다. 유학 시절인 30대 중반에 정점을 찍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내 영어회화 실력은 세월이 흐르면서 급격히 한심한 수준이 됐다. 일상에서 영어로 대화 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당연지사다. 그런데 어떻게 콩글리시에 점점 가까워지는 회화 능력으로 나와 마음이 통하는 외국인 친구와 곧바로 찰떡궁합이 되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소위 '알코올 분해효소'를 갖지 못해 술도 잘 못 마시는 터라 술의 힘을 빌리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평소의 나는 사람 평가에 까다로운 편이어서 친밀한 관계가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부류에 속한다.
재미있게도,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다가 또 한 명의 외국인 친구를 얻게 됐다. 레슬리라는 이름의 호주 평론가인데 그녀는 심지어 열다섯 살은 나보다 어렸다. 그녀는 나처럼 신인 급 감독의 한국영화 및 아시아영화를 선보이는 '뉴 커런츠' 섹션 대상의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터라 우리는 일주일 간 하루에 꼭 한 번은 만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했다. 하지만 자주 보는 것이 우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와 레슬리 외에 프랑스, 인도, 체코에서 온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문화 및 성격 차이 때문에 잠시나마 한랭전선이 형성된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이는 살짝 불평을 털어놓기까지 했다. 물론 신분증을 서로 확인하는 우스꽝스러운 일까지 하진 않았지만 영화제 중반에는 각자의 대화를 통해 나이 분포도가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난 터였다. 이 정보에 의하면 나는 다섯 명 중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레슬리는 가장 어렸다. 그런데 단 며칠 만에 나와 레슬리는 예상 외로 친해졌다. 영화 취향도 흡사했고 잘 통했다. 체코에서 온 심사위원이 "너희 혹시 베스트 프렌드냐"며 놀렸을 정도다.
레슬리 또래의 한국 여성이라면 내가 정말 '친구'처럼 격의 없이 장단을 맞출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지 생각해봤다.
바로 자국의 가치와 문화를 대변하는 영어와 한국말의 차이가 원인이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나이나 기수에 따른 서열이 중시되며 언어도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존댓말과 반말이 엄연히 존재하는 까닭에 한국인들은 만나면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이런 서열부터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영어는 다르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친밀도에 따라 부모나 스승까지도 그냥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수평적 관계가 자연스럽다. 돌이켜보니 뉴욕에서의 영어 연수시절 나와 가장 각별했던 친구도 내 또래나 연상이 아니라 나보다 열살 정도 어린 일본여성 히로코였다. 내가 영어를 쓰는 환경에서 주로 훨씬 연하의 외국여성들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내가 나이 들면서 잊어가고 있는 미덕들을 새삼 일깨워주기 때문인 것 같다. 기숙사에서 만난 친구들 중 히로코 역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학생이었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갖는 장점을 최대한 즐길 줄 알아서 열정적으로 곳곳을 탐방하고 다녔고 자신의 전공인 영화 연출에 도움이 되는 일엔 두려움 없이 뛰어들었다. 훗날 내가 사흘 꼬박 침대 신세만 져야할 정도로 아팠을 때 한국 식당에 찾아가 설렁탕과 밥, 반찬들을 포장해 멀리 떨어진 우리 집까지 전철을 타고 손수 배달해준 이도 히로코였다. 하지만 조금 아쉽기는 하다. 나이에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서툰 영어를 통해서 더 쉽게 맺게 되는 이 현실, 이 문화 말이다.
김선엽 수원대 연극영화학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