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인기 공약 베끼기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2004년에는 이라크 전쟁, 2008년에는 건강보험 개혁을 놓고 공약 따라 하기가 벌어졌다. 이번 공화당 경선에서도 피자 체인점 갓파더 최고경영자(CEO) 출신 허먼 케인의 일괄과세안에 대한 유사 공약이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세제 문제가 경선 쟁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9-9-9 플랜으로 불리는 케인의 공약은 개인소득세, 법인소득세, 판매세를 9%로 묶어 일괄과세하자는 것이다. 복잡한 세율에 지친 많은 미국인들이 예상밖으로 지지를 보내면서, 케인은 일약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위협하는 후보로 부상했다.
그러자 1996년 “일괄과세는 살찐 고양이(부자)를 위한 감세”라고 비난했던 롬니가 일괄과세 찬성으로 급선회하며 따라하기에 나섰다. 뉴욕타임스는 “부자와 중산층에 부담이 되는 정책에 반대하던 롬니가 입장을 바꾸었다”고 지적했다. 존 헌츠먼 전 유타 주지사는 “세금 문제는 내가 롬니보다 보수적”이라고 야유했다.
케인 공약을 가장 많이 베낀 후보는 공교롭게도 케인 때문에 선두권에서 멀어진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다. 그는 개인소득세와 법인세를 20%로 단순화하자는 20-20 플랜과 함께 연 수입 50만달러 이하 가정에 대해서는 지방세를 감면하는 다분히 포퓰리즘적인 공약도 공개했다. 그러면서 롬니에게 “세제개혁에서 주변만 서성대고 있다”며 자신처럼 빨리 케인의 공약을 더 베낄 것을 주문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페리가 케인처럼 세제에서 경선 판세를 뒤집을 모멘텀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공화당 경선의 선두권인 3대 주자가 모두 찬성하는 일괄과세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에 후보 입장에선 부담이 덜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부유층 증세로 비쳐질 수 있어 내년 대선 본선에서 공화당의 공약이 될지는 미지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경기활성화 재원 마련을 위해 추진하는 증세의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세에 철저히 반대하는 공화당은 그렇지 않아도 부자 증세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확산되면서 난처한 상황이다. 26일 의회 슈퍼위원회에서 민주당이 1조달러 세수확대를 통한 최대 3조달러 재정 감축안을 제시하자마자, 공화당이 즉각 반대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지만 증세 논란은 계속 확산되고 있어 1912년 논란이 됐던 수입관세 폐지에 이어 100년 만에 세금 문제가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이달 초 CBS조사에서 미국인 64%가 ‘버핏룰’인 부자증세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27일 컨설팅회사 스펙트럼 그룹 조사에서 백만장자 중 무려 68%가 부자 증세에 찬성했다. 이들은 증세는 싫으나, 경제 자극을 위해 필요하다고 본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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