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현리 마당 귀퉁이에 참꽃이 피었습니다. 무리 지어 화사하게 핀 것은 아니지만 몇 송이 핀 것을 보고 봄에 피는 꽃이 왜 가을에? 라고 생각하다가 달력을 보니 음력 시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음력 시월을 두고 옛사람들은 '소춘'(小春)이라 말했습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 봄이, 그것도 키 작은 봄이 잠시 머물다 갑니다. 음력 시월을 '작은 봄'으로 부른 것은 자연에 대해 맑은 눈을 가졌던 선인들이 남긴 참으로 지혜로운 은유입니다. 서서히 떠나가는 가을과 서서히 찾아오는 겨울 사이, 그 사이에 놀랍게도 계절의 간이역인 봄이 여행 가방을 들고 서있습니다.
어느 해 소춘에는 목련이 피었고, 올 소춘에는 봄나물인 냉이 새싹이 올라와 늦가을 밥상에 때 아닌 냉이나물이 한창입니다. 또 길가에는 노란 개나리가 피었습니다. 일상을 잠시 비트는 자연의 위트를 무심하게 달력만 넘기며 사는 사람들은 모를 일입니다. 분, 초 단위로 시계만 보며 달려가는 사람은 더더욱 모를 일입니다.
바코드의 디지털 시대는 '오래된 미래'가 읽었던 자연이라는 경전을 오류라고만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잠깐 찾아오는 봄을 눈으로, 맛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계는 지금 몇 시를 지나고 있습니까? 가끔은 자연의 시간에 맞춰 주시길. 이 봄날, 내일은 당신을 위해 향기로운 냉잇국을 끓이겠습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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