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대선 정국까지 앞당겨 가늠케 한 재보선 대격돌이 끝나고, 정치권은 저마다 받아 든 성적표를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가 집권여당, 더 나아가 정치권 전반에 대한 2040세대의 분노의 표출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청년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 정리해고의 공포 등에 짓눌린 이 세대들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얄팍한 위로조차 건네지 못한 낡은 정치에 대한 '사망 선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거시적 진단을 수긍하고 보더라도, 막바지 여론조사에서 박빙의 양상이던 양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실전에서 7%포인트나 벌어진 데는 '네거티브 역풍'이 결정타로 작용한 것 같다. '검증'이란 이름을 앞세운 무차별 흠집내기로 정치권 바깥 새 인물에 한껏 쏠렸던 민심의 한켠을 허무는 데 성공한 듯했던 나경원 후보 측은 박원순 후보 측 맞불 검증 공세에 주춤하더니 막판 불거진 '연회비 1억 피부클리닉' 역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사실 '1억 피부클리닉' 논란을 처음 접했을 땐 그 파괴력이 그렇게 강력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 후보가 거대 사학재단 집안에서 '은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임을 다 아는 마당에, 연예인이나 상류층이 애용한다는 고가 피부클리닉에 드나들었다고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나 후보 측 해명은 남들처럼 1억원 연회비를 다 내고 다니지는 않았다는 것인데, 문제라면 그런 특혜를 아무렇지도 않게 누린 것이 더 문제 아닌가.
그러나 이런 생각이 일반적인 민심, 특히 여심(女心)과는 동떨어진 것임이 금세 드러났다. 주위에서 "그건 미용에 도통 관심 없는 네 생각일 뿐이야!"라는 핀잔이 쏟아졌다. 생활에 쪼들려 화장품 하나 맘 놓고 못 사는 주부들은 물론, 좋은 학벌과 직업, 배우자 등 갖출 것 다 갖춘데다 예쁘기까지 한 그에게 호감을 느끼던 이들도 그 미모가 온전히 '1억원짜리 피부관리'덕인양 분개했다. 이 원초적 분노가 2040세대의 억눌린 분노와 만나 일으킨 파장은 대단했다. "한방에 훅~ 갔다"는 시쳇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정권 심판론이 득세한 상황에서 민심을 붙들 뾰족한 정책 및 비전도 찾지 못한 한나라당은 손쉽게 네거티브 공세에 매달렸다가 되레 역풍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 한나라당의 어리석음만 비웃고 말기에는, 이번 선거의 검증 공방이 남긴 상처와 후유증이 너무 크다. 몇 안 되는 성공한 여성 정치인 중 한 사람인 나 후보에게 '1억짜리 피부미인'이란 딱지를 붙이고 조롱하는 것은, 기부문화 정착을 위해 헌신해온 박원순 후보의 삶을 '협찬 인생'이라고 비아냥대는 것 못지않게 온당치 못하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 벌써부터 흘러나오는 '안철수 검증론'에는 음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라의 녹을 먹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혹독한 검증을 거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혹독함에는 합리적 의심과 명확한 사실관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제 잘못이 드러났다면 솔직히 고백하고 사죄하되, 상대 측 잘못에 대한 최종 판단은 유권자에게 맡겨야 옳다. 안타깝게도 이번 선거에서 양 후보 진영이 벌인 검증 공방의 상당부분은 뭐라도 하나 걸렸다 하면 죽자고 물고 늘어져 매질을 해대는 진흙탕 싸움에 가까웠다. 그 검증공세를 재검증해야 할 언론들도 객관주의 저널리즘을 방패 삼은 중계 보도로 의혹만 부풀리거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반영된 교묘한 편집으로 상대 진영 흠집내기에 가세했다.
이번 선거에서 정치권은 너나 할 것 없이 낙제점 아니면 기껏해야 D학점의 성적표를 받았다. 공멸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이 쩨쩨하고 위험한 검증게임은 이번 선거로 끝내야 한다.
이희정 문화부장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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