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골퍼 서유정(29)이 주경야독(晝耕夜讀) 생활을 한지도 벌써 3개월 째다. 낮엔 골프를 치고 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30일 펀드투자상담사 자격증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다. 골프선수가 웬 금융업 자격증이냐 싶겠지만, 서 프로에게는 직업 하나가 더 있다. 대우증권 본사 프라이빗뱅킹(PB)마케팅부 직원이다. 최우량 고객(VIP)과의 필드 소통을 위해 올 7월 채용된 '마케팅 골퍼'인데, 주로 VIP와 라운딩을 하면서 골프 개인지도를 하는 것이 주업무다. 얼마 전 한 VIP 고객은 서씨와의 라운드 직후 10억원을 선뜻 대우증권에 맡기기도 했다. 그는 "선수가 아닌 직원으로 증권사에 입사하면서, 골프선수 출신인 제1호 PB 전문가를 꿈꾸었는데 회사에서도 이번 시험을 위해 특별 과외 선생님까지 붙여주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업계의 골프 사랑은 물론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뭉칫돈을 모으고 자산을 불리는 게 업이다 보니, 거액 자산가 유치가 금융회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자산가 상당수가 골프를 즐기고 있고, 골프를 매개로 사업을 확장하고 인맥을 넓힌다. 금융회사들이 경쟁적으로 프로골프대회를 개최하고 실력파 선수를 발굴해 후원하는 것도 바로 이런 거액자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금융사 중에도 특히 증권사들의 골프 마케팅이 기발하다. 필드에서 활동하던 프로골퍼들을 증권사 조직 내로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대우증권이 2009년 11월 처음으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출신 2명을 직원으로 뽑은 이후 소위 '마케팅 골퍼'가 대우증권 2명, 우리투자증권 3명, 동양종금증권 1명, HMC투자증권 1명 등 총7명으로 늘었다.
독특한 점은 이들 증권사 모두 여자 골퍼만 영입했다는 사실이다. 여성 마케팅 골퍼들의 비거리가 대개 남성 아마추어 고수와 엇비슷한데다, 소통 능력도 뛰어나 금상첨화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송석준 대우증권 PB마케팅 부장은 "골프장마다 경기를 시작하는 티박스 위치가 레이디, 레귤러, 장타자용 세가지로 나뉘는데 여성 마케팅 골퍼들은 남성 고객과 같이 레귤러티에서 티샷을 한다"며 "비거리가 비슷하니 함께 경기를 즐길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그만큼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마케팅 골퍼 선발과정은 프로자격 취득만큼 까다롭다. 고객과 소통하는 직업이다 보니 골프실력 외에 외모와 태도도 중요한 요소다. 증권사들은 보통 KLPGA의 추천을 받은 선수들 중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쳐 최종 선발한다. 이후 약 3개월에 걸쳐 인성, 태도, 표정, 평판 등을 살펴보고 채용 후에도 두 달 이상 고객 응대 방법과 말투, 몸짓 등을 교육한다.
이 같은 마케팅 골퍼 채용으로 증권사들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허광우 우리투자증권 총무부 차장은 "지난해 10월 이후 조정연, 구윤희, 손혜경 선수 등 3명을 영입했는데 최근 지점 영업사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마케팅 골퍼에 대한 만족도가 80%를 넘었다"고 말했다. 마케팅 골퍼와 라운딩 한 VIP들이 대부분 만족해 했고, 실제 계약 성사로 이어진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아직 골프에 입문하지 않은 VIP들 중에서도 "골프를 배워서라도 마케팅 골퍼와 라운딩을 하고 싶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마케팅 골퍼들은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근무하고 월ㆍ화요일은 쉰다. 지점에서 VIP나 법인고객을 모아 신청하면 함께 동반 라운딩과 레슨을 해주는데 보통 주말엔 필드에 나가고 주중엔 스크린골프장으로 출동한다.
1년 계약직이 원칙이지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계약은 자동 연장된다. 우리투자증권도 기존 3명의 프로골퍼 직원들과 얼마 전 재계약을 마쳤고 대우증권도 한현정 선수와 2009년 11월부터 지금껏 함께해오고 있다.
연봉은 6,000만~7,000만원 수준인데 식사비와 교통비는 따로 지급되고 고객 평가와 업무 평가를 통해 별도 성과급도 지급된다.
안정된 지위와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덕에 마케팅 골퍼는 최근 프로골퍼들 사이에서도 인기 직업으로 뜨고 있다. 프로골퍼라 해도 각종 대회에서 우승권의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금세 잊혀지기 십상이다. 투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 레슨 프로로 전향하거나 골프 방송에 출연하는 게 전부인데 이마저도 겨울엔 비수기라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반면 마케팅 골퍼는 어엿한 직장과 고정적 수입을 보장해주고 역량에 따라서 전문적 금융인으로 변신할 수도 있다. 서유정 프로도 2002년 KLPGA 프로 테스트를 1위로 통과하며 각광을 받았지만 이듬해 국내대회에서 톱10에 든 게 최고 성적이었다. 대우증권에 입사하기 전까진 슬럼프에 빠져 마음고생이 심했고, 운동을 그만둬야 하나 여러 번 좌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 프로는 이제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는 "처음엔 생경한 조직생활이 두렵고 프로선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증권사에 입사하는 게 망설여졌지만, 도전해 보니 적성에 맞고 무엇보다 골프가 다시 즐거워졌다"며 "PB로 성공해 후배 골퍼들에게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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