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처남이 집에 놀러 와 함께 저녁을 했는데,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오랜만에 고스톱을 쳤다. 그 재미에 빠져서 한참 치다 보니 문득 처남이 저녁을 안 먹은 것 같아 "밥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아내도 "내 정신 봐, 동생 저녁도 안 먹이고 놀았네"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처남은 어이없다는 듯 "좀 전에 함께 식사했잖아요"라며 웃었고, 이내 그 사실을 깨달은 아내와 나는 크게 웃었다. 한바탕 웃었지만 아내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지 그 다음 날 바로 치매에 좋다는 오메가3를 샀고, 우리 부부는 함께 먹고 있다.
■ 요즘 50대 초반의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 황당한 에피소드를 쉽게 듣는다. 휴대폰을 손에 들고서 찾느라 고생했다든지, 차를 몰고 출근했다가 지하철을 타고 퇴근한 뒤 다음날 아침 아파트 주차장에서 헤맸다든지, 뉴서울CC에서 만나기로 해놓고 서서울CC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는 등 배꼽을 쥐게 하는 스토리들이 많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재미있지만, 자신이 자주 건망증을 보이면 치매를 걱정하기 마련이다. 건망증이 일에 집중하거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으로 치매와는 무관하다고 하지만, 어쨌든 썩 유쾌하지는 않다.
■ 방송 드라마에서도 치매가 다뤄지는 모양이다. 김수현 작가의 이 그것인데,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를 지키는 한 남자의 사랑을 다룬다고 한다. 2주 전 시작됐다는데, 벌써부터 주부들을 TV 앞에 붙들어 맬 기세다. 치매에 걸린 사람과의 사랑은 고통이지만, 그 비극을 초월한다는 구도가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딱 좋다. 2004년 개봉, 화제를 모았던 도 비슷한 구도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고통과 상처를 입지만, 가족의 사랑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일본 영화 도 있다.
■ 그나마 드라마나 영화는 낭만적이지만, 현실에서의 치매는 무척 잔인하다. 연로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을 경우 당사자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가족들도 황폐해지게 된다. 개인도 그럴진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쉽게 망각증에 빠진다면 병든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서울시장 선거가 끝나고 승패 분석과 향후 정치향방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면서, 아직 여러 의혹이 해명되지 않은 내곡동 사저문제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한 번, 두 번 그냥 넘어가면, 그 사회는 건망증보다 더 심한 치매에 걸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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