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무소속 박원순 당선/ 서울시장 박원순은 누구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무소속 박원순 당선/ 서울시장 박원순은 누구

입력
2011.10.26 17:39
0 0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는 26일 1,000만 서울시민의 삶을 책임지는 행정가로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시민운동의 대부'였던 박 당선자가 지난달 서울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후 한 달 남짓 만에 서울시장이 돼 야권의 유력 정치인 대열에 오른 것은 그의 인생 역정만큼이나 극적이다.

1956년 경남 창녕의 농가에서 2남 5녀 중 여섯째(차남)로 태어난 박 당선자는 75년 대학 1학년 때 반독재 시위에 참가했다 투옥된 이후 80년대에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고, 90년대 이후 최근까지 시민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꾸준히 개척해 온 시민운동가였다.

제1막 평범한 대학생에서 인권변호사로

박 당선자는 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평범한 시골 출신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해 5월 박정희 군사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반대하는 교내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4개월여의 수감기간 동안 읽은 독일의 법철학자 루돌프 폰 예링의 은 그를 법률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한다. 투옥으로 서울대에서 제적된 그는 76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78년 법원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춘천지법 정선등기소장으로 지냈고 결국 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박 당선자는 사법연수원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조영래 변호사를 만난다. 당시 학생운동권의 전설로 불리던 조 변호사는 뒤늦게 고시를 봐 연수원에 들어와 있었다. 박 당선자는 82년 대구지검 검사로 발령받았지만 1년 만에 그만 두고, 조 변호사와 함께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수많은 시국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박 당선자는 조 변호사 등과 함께 정법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가 2년 뒤 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으로 확대됐다.

제2막 시민운동가로 변신

박 당선자는 91년 훌쩍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87년 6월 항쟁 이후 김영삼ㆍ김대중의 분열에 따른 좌절과 90년 12월 조 변호사의 사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듬해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1년을 머물렀다. 그가 유학에서 돌아와서 94년에 만든 것이 참여연대였다. 그는 참여연대 시절 '1인 시위'라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어냈고 예산정보 공개 운동, 소액주주 운동을 벌였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는 낙천ㆍ낙선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98년 미국 아이젠하워재단 초청으로 미국에 두 달을 머물 때 헤리티지재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모금은 예술이고 과학이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부문화를 확산시키고자 2000년 참여연대를 떠나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만들었다. 이어 2006년에는 아이디어로 사회개선운동을 벌이는 희망제작소를 창립해 스스로 '소셜 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하철 높낮이 손잡이' '임산부 알림 배지' 등의 생활 속 아이디어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들과 함께 진행해 온 희망나눔 프로젝트는 희망제작소의 대표적인 성과다. 시민운동의 무게중심을 권력 감시와 시민권리 확대에서 기부문화 확산과 사회개선을 위한 아이디어로 옮겨놓은 것이다.

제3막 야권 유력 정치인으로

지난달 박 당선자가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밝힌 이후 그는 사실상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셈이다.

그간 시민운동가 박원순은 여야를 불문한 정치권의 영입대상 0순위였다. 2004년 총선 때 한나라당으로부터 비례대표 1번을 제의를 받았고,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으로부터 서울시장 후보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오히려 그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자기 생각에 맞는 후보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의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과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와의 본선에서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게 됐다.

박 당선자는 지난 한 달 동안 정치인으로서 혹독한 검증을 피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재단이 받은 대기업 기부금은 가장 큰 논란거리였다. 박 당선자가 몸 담았던 참여연대의 대기업 비판 때문에 결국 대기업들이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또 양손(養孫) 입적을 통한 병역기피 의혹, 배우자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 의혹, 학력 위조 의혹 등이 한나라당의 파상 공세의 표적이 되었고 박 당선자는 이에 대한 해명으로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를 두고 박 당선자를 도운 야권 일각에서도 "박 당선자가 정치인으로서 준비가 덜 된 게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기성 정치권에 불만을 가진 유권자들은 지난 30여년 간 한국사회를 부단히 변화시키기 위한 그의 열정에 주목했고, 차기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그를 선택했다.

●약력

▦경남 창녕ㆍ55세 ▦경기고∙단국대 사학과 졸(서울대 사회계열 1년 중퇴) ▦대구지검 검사(사법고시 22회)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재단ㆍ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배우자 강난희씨와 1남1녀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