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지금 평양에선'이란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3년, 북한을 악마화하고 김정일 위원장을 희화화하여 표현했던 이 드라마는 1년 가까이 방송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모았다.
시대와 거꾸로 가는 이념 논쟁
당시의 상황에서 북한은 말 그대로 악마였고, 김정일은 기행을 일삼는 망나니 정도로 인식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김 위원장을 흉내 낸 배우가 파마 머리를 하고 나온 것밖에는 기억에 없다. 그 만큼 오래 기억되지는 못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의미이다. 냉전이 한창인 당시에, 그리고 남북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던 시대에 상대방의 못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었던 것 이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2000년대 들어와 남북의 교류와 협력이 진척되면서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악마화와 희화화는 점점 더 설 자리를 더 잃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핑계로 자신들의 주장을 인정받으려는 시도와 상대방을 몰아세우는 낙인 찍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되풀이되는 이러한 구태는 이제 막 끝난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참으로 씁쓸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색깔론을 제기했던 사람들이 다시 얼굴을 싹 바꿔서 북한과 대화를 하자고 나설지도 모른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하니, 지켜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색깔론은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다. 분단이라는 숙명적 상처에 따르는 지병과 같다고 하겠다. 63년 치열했던 윤보선-박정희의 대선부터 시작하여 지난 대선에 이르기까지 색깔론은 우리의 선거역사와 더불어 함께해왔다. 그다지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일관성 있는 선거가 계속되어왔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을 수는 있겠다. 다행히도 2000년대 이후 색깔론의 농도와 세기가 약해지고 있다. 또 이를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도 과거와 같지 않다. 색깔론을 제기하는 측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색깔론이 생명을 다하고 있는 증거라 하겠다. 그런데 왜 색깔론이 멈추지 않는 것일까.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북한과 관련해 '낙인'을 찍을 수 있다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거나 혹은 자기 편을 만들 수 있다는 오랜 사고방식이 관성처럼 남아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정책보다는 이미지가 우선시되는 지금의 선거 문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가 우선시되다 보니 상대방의 이미지를 깎아 내릴 수 있는 소재로 '색깔론'의 유혹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색깔론일까. 아마 색깔론을 제기한 사람들도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개성공단을 방문하여 현 대북 강경책에 유연성을 주장하던 그 분의 입에서도 '종북주의자' 운운하는 언급이 나오는 걸 보면 깊이 있게 생각하고, 확신을 가지고, 혹은 무언가 사실을 가지고 '색깔론'을 제기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냉전 의식과 단절하지 못하고 '낡은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낡은 사고방식 벗어던져야
과거 '지금 평양에선'이라는 드라마는 그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을 표현하는 것이긴 하지만, 국민들에게 감정적 만족이라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오늘날 '지금 평양에선'을 반복한다면 국민들이 그때와 같은 감정적 만족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제네바'에선 그렇게 색깔론의 소재가 된 '북한'과 우리에게 은혜의 나라로 칭송되는 미국이 자리를 함께 했다.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색깔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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