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치고 보자'식 통폐합… 특성화 사라지고 덩치만 커져
#2005년 통합한 전남대와 여수대. 정부는 두 대학에 294억원의 통폐합 지원사업비를 주는 대신 16개 유사 중복학과를 통합하도록 했다. 그러나 통합한 지 6년이 지났지만 행정학과, 전자통신공학과, 수학과 등 5개과를 정리했을 뿐 경영학부, 영문과, 건축학부 등 나머지 학과들은 광주와 여수 캠퍼스에 중복돼 있는 상태다. 전남대 관계자는 "유사 전공을 없앨 계획이지만 사실 양쪽 캠퍼스가 차로 1시간30분 거리라 기초학문 학과는 양쪽에 그대로 두는 게 학생들의 위해 낫다"며 "이렇게 시너지효과가 크지 않아, 통합 지원금을 받긴 했지만 장기적으론 대학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정부로부터 226억원을 지원받고 천안공대와 통합한 공주대. 그런데 통합 이후 학교 이름 때문에 갈등이 깊어졌다. 천안지역 주요 기관단체장이 참여하는 천안발전회는 올해 8월 학교명을 바꿔달라는 청원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했다. 통합 당시 '제3의 교명'을 사용하기로 합의한 것을 공주대가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천안발전회는 교통표지판에 공주대 안내 문구를 삭제해달라고 천안시에 요구할 정도다.
통폐합으로 백화점대학만 양산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립대학 통폐합 정책은 곳곳에서 후유증을 낳았다. 국립대 구조개혁에 대한 뚜렷한 방향과 목표 없이 정원감축과 통폐합 실적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김재삼 한국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대학간의 특성이나 거리, 캠퍼스 간 역할분담에 대한 고민 없이 '일단 합치고 보자'는 성격이 강했다. 교과부가 국립대에 시장주의를 도입하겠다며 지원금을 앞세워 통폐합을 사실상 강요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교과부는 한쪽으로는 특성화를 요구하면서도 특성화된 소규모 국립대학을 합쳐 종합대학으로 만드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전남대에 통합된 여수대는 당초 수산분야 특성화대학이었지만 지금은 종합대학의 제2캠퍼스가 돼 버렸다.
공주대도 출발은 공주사대였다. 70~80년대만 해도 서울대 사대, 경북대 사대 등과 함께 명문 사대로 이름을 떨쳤지만 교사 정원이 축소되고, 국립 사범대 졸업생의 의무발령제가 폐지되자 자구책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1992년 예산농전, 2001년 공주문화대, 2004년 천안공대와 차례로 통합해 4개 캠퍼스를 거느리게 됐다. 공주사대 출신의 한 교과부 관계자는 "무분별하게 덩치만 키울 게 아니라 교원양성대학의 특성상 차라리 공주교대와 통합했더라면 시너지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폐합을 수도권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철도대(경기 의왕)는 2004년 통합 계획이 추진됐을 때 충남대, 전북대, 부산대, 공주대 등 수많은 국립대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끝에 결국 올해 충주대와 통합이 결정됐다. 수도권으로 영역을 넓혀 학생들을 끌어당기겠다는 지방 국립대들의 계산 때문이었다. 지역 균형 발전을 담당해야 할 지방 국립대들이 거꾸로 수도권 진입을 통해 살아남겠다는 것이다.
공공성 외면한 국립대 정책
현 정부의 국립대 구조개혁의 문제는 대학의 공공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논리만으로는 존립이 어려운 인문학 등 기초학문을 육성하고, 학생들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국립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시장주의적 경쟁만을 강조하고 있다. 한 국립대 교수는 "구조개혁 중점추진 대학을 선정하는 지표 중 재학생 충원율, 취업률의 비중이 높은데 일반적으로 기업 취업이 저조한 예체능이나 인문계열 학과는 고사 위기를 맞아도 괜찮다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김재삼 연구원은 "대학을 통폐합하고, 구조조정하는 목표가 무엇이고, 그 속에 국립대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철학이 없다"고 비판했다.
유현숙 한국교육개발원 고등교육연구본부장은 "정부는 국립대의 연구분야를 정비하면서 시장에 맡기면 고사하는 인문학과 기초분야에 대해 집중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를 통해서 성과가 나오기 때문에 사립대가 외면하지만 국가적으로 필요한 연구는 국립대가 담당하는 것이 제 역할과 기능을 찾는 길"이라고 말했다.
국가적으로 특성화 전략 세워야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는 1960년대 고등교육을 위한 마스터 플랜을 세워 각 캠퍼스를 명문으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중구난방식으로 경쟁을 벌이던 30여개의 캠퍼스를 기능과 역할에 따라 통일된 체제로 재편했다. 연구중심대(UC), 교육중심대(CSU), 산업중심대(CCC)의 세 단계로 특성화해 UC는 고교성적 상위 12.5%, CSU는 상위 33.3%의 학생을 받도록 했고, 대신 정원의 40%를 편입으로 채워야 한다는 규정을 둬 2년제인 CCC 학생들이 자유롭게 편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최근 15년간 노벨상 수상자가 12명 나왔고, 올해 발표된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미국 대학 순위에서 UCLA, UC버클리, UC샌디에이고, UC데이비스 등 7개 캠퍼스가 100위안에 들었다.
한국도 강점을 가진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국립대 특성화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산업연구원의 김영수 박사는 "충청권은 IT와 의약 바이오, 강원권은 관광휴양 및 웰빙산업, 호남권은 신재생에너지와 친환경부품소재 등 녹생성장 관련 산업, 대구경북권은 태양광, 의료기기 등 첨단지식 산업, 경남권은 기계부품과 물류 등 기간 산업, 제주권은 관광레저 등 광역별 선도산업과 연계한 대학의 특성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지방 거점 국립대의 관련 학과에 파격적인 지원을 해 채용과 연계시켜 국내 최고 수준으로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철밥통' 국립대 교수사회도 문제
한 지방 국립대 교수의 연구실은 늘 굳게 닫혀있다. 강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로 부리나케 올라가는 터라 학생들은 교수의 얼굴을 통 볼 수 없다. 한 거점 국립대의 사무국장을 지낸 교육과학기술부의 관료는 "서울에 집을 두고 통학하는 교수들이 하루 이틀에 강의를 몰아서 해 학생들의 불만이 컸다. 오죽하면 3일 이상씩 나눠 강의를 진행하라는 규정이 생겼고 애당초 임용 때부터 거주지를 해당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조건까지 제시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고등교육의 공공성 확보는 필요하지만 현실에 안주한 채 경쟁력을 키우지 않는 대학까지 퍼주기 지원을 하는 것은 문제가 적지 않다. 지방 국립대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이른바 '철밥통'으로 불리는 교수사회부터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립대 교수들은 사립대에 비해 정년도 쉽게 보장되고, 공무원처럼 근무기간에 따라 자동으로 보수가 늘어나는 호봉제 적용을 받다 보니 경쟁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교과부에 따르면 지난해 10개 거점 국립대 전임교원 1인당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논문수는 0.4편으로 주요 사립대 10곳의 논문수(0.5편)보다 낮았다. 기술이전수입료도 사립대는 지난해 11억 9,234만원을 벌어들인 반면 국립대는 8억 9,092만원에 그쳤다. 이마저도 서울대를 제외하면 실적은 더 저조해진다.
연구하지 않는 교수들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정년심사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정년 보장 이후에도 연구실적을 의무화하는 강도 높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지난해 충남대 전임교원 중 논문 등 연구실적이 아예 없는 교수는 198명에 달했다. 전체 전임교원 886명 중 20%가 넘는 수치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육학과 교수는 "통과율 100%로 요식 행위에 그치는 정년심사, 한번 교수는 영원한 교수라는 무사안일주의가 가장 큰 문제"라며 "정년 보장 후에도 연구실적을 요구해 긴장감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을 정치판으로 변질시키는 총장직선제도 문제점이 없지않다. 박정원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학문적 역량이나 비전보다는 학내 정치에 뛰어난 사람이 후보로 나서고 교수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 마구잡이로 공약을 남발하다 보니 학교재정의 낭비를 초래하는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교과부가 총장직선제를 시행하는 국립대의 공약상황을 조사한 결과, 교수직원 급여의 실질적 인상 및 후생복지 개선이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교과부의 의지대로 총장직선제를 폐지하기보다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잿밥에 관심 많은 교수들이 문제지 총장직선제 자체는 대학 내 민주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했다. 김형기 전국국공립대학교수회연합회 회장(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도 "후보검증을 보다 엄격히 하고 부정선거가 발각될 시 후보 사퇴뿐 아니라 교수직까지 박탈하는 수준의 강도 높은 개혁안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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