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ㆍ중 간 위안화 환율을 두고 갈등이 되풀이되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적정환율 문제가 대두되기는 일본 엔화가 먼저다. 소니의 ‘워크맨’이 세계를 석권하고 도요타 ‘캠리’의 발돋움이 시작될 무렵인 1985년. 대일 무역에서만 400억 달러를 훌쩍 넘길 정도로 미국의 무역적자가 커지자 국제적 해결책이 모색됐다.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낮춰 미국의 수출을 자극하자는 것이었다. 이게 ‘엔화와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하며, 순조롭지 않을 경우 정부의 협조 개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는 플라자합의의 배경이다.
▦문제는 플라자합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기세와 미국의 무역적자 증가세는 꺾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94년엔 오히려 캠리 등 일제 자동차의 미국 석권으로 미국 자동차 산업은 궤멸 위기를 맞았고, 대일 무역적자는 673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클린턴 행정부는 자동차 무역역조를 해소하기 위한 미일 자동차협상에 사활을 걸면서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엔고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통화전쟁’을 벌인다. 이 결과 엔화 가치가 95년 4월 전후 최고치인 달러당 79.75엔까지 치솟자 일본 수출업체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게 된다.
▦이때를 전후한 극단적 엔고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에서 일본과 수출경쟁에 나선 우리에겐 천운이 됐다. 반도체 매출의 비약적 증가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94년도에 1조원의 순익을 거둔다. 그때 차량 가격 1만 달러 이하의 미국 소형차 시장에서는 도요타 ‘터셀’이 9,998달러까지 오른 반면, 현대 ‘엑센트’는 8,079달러에 불과해 울산 공장을 밤낮없이 가동해도 물량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엔고로 일본 자금이 역내에 풀리면서 철강 자동차 유화 등 국내 중후장대 산업의 설비투자도 엄청났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었다.
▦하지만 ‘엔고 호황’은 거대한 착시였다. 지나친 달러 약세에 따른 미국의 금융불안 우려와 수출 경쟁력 회복이라는 일본의 이해가 맞물려 95년 4월 ‘엔ㆍ달러 환율의 질서정연한 반전’을 목표로 한 역플라자합의가 나오자 엔ㆍ달러 환율은 단숨에 100엔 대까지 치솟는다. 연말까지 불과 8개월간 20엔 이상 떨어진 엔화 가치의 급락은 가뜩이나 불황에 직면한 국내 기업의 수출을 위축시켜 한계상황까지 몰아간다. 이게 결국 한보와 기아의 부도를 거쳐 97년 외환위기로 이어진 셈이다. 요즘 엔화가 달러 당 76엔 대까지 가는 초엔고가 다시 이어지고 있다. 수출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안주하기엔 위험한 현상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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