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여행/ 태백 함백산 자작나무 숲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여행/ 태백 함백산 자작나무 숲

입력
2011.10.26 12:03
0 0

■ 여기 깃들어 기도하고픈… 순백의 가을 속으로

순백의 가을로 간다. 온갖 원색이 뒤섞여 야단스러운 산과 들, 그 안에서 거드럭거리는 인간의 풍경을 버리고 간다. 김현승이 "호올로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겸허와 고요의 계절을 찾아서. 강원도 지도를 펴고 폐도가 된 옛 38번 국도의 흔적을 더듬는다. 만산홍엽의 백두대간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듯한 무채색의 함백산. 문 닫은 탄광이 검은 아가리를 감추고 있는 이 산에 자작나무가 만든 새하얀 가을이 있다.

시베리아 대륙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펼쳐진 광활한 냉대 침엽수림을 배경으로 가녀린 흰 가지를 떨고 있는 나무. 이국적인 분위기를 좇아 자작나무를 정원수로 심는 사람이 많다. 도심 카페에선 몸통만 잘라내 가짜 이파리를 달아놓은 것도 볼 수 있다. 그런 자작나무의 원산지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확히는 군사분계선 북쪽의 공화국이 이 나무의 고향이다. 백두산 수림과 두만강 유역 고원지대, 량강도의 넓은 숲을 자작나무가 하얗게 분칠하고 있다. 그리고 겨울이 깊은 강원도에 이 나무가 산다.

함백산(1,573m) 가는 길, 정선군 고한읍에서 태백시로 가는 방향에 두문동재 넘어가는 고갯길이 국내에서 가장 큰 자작나무숲으로 이어지는 옛 도로다. 고속도로처럼 새로 뚫린 38번 국도의 터널을 몇 차례 왕복하고 나서야 진입로를 찾았다. 아직 시월인데 자동차에 내장된 온도계는 영하 3도를 가리킨다. 차도 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는 길엔 수북이 낙엽이 쌓여 있다. 등산객들이 내리는 곳을 지나치자 도로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머리핀처럼 급하게 꺾이는 내리막길을 돌고 돌아 8부 능선, 숲이 거기 있었다.

산의 골과 마루가 몇 차례 반복되도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자작나무. 단일 수종으로 이뤄진 숲 치고 이렇게 넓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이곳은 1980년대 말 조성된 인공림이다. 아카시아, 오리나무로 급하게 민둥산을 덮는 조림의 문제점이 제기되자, 조경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자작나무를 이 시기 집중적으로 심었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성장이 더디다. 다 자라도 둘레가 90㎝가 넘지 않고 높이도 20m에 불과하다. 알락하늘소 같은 병충해에도 약하다. 자작나무는 '실패목'으로 규정돼 더 이상 나랏돈으로 심지 않는다.

조림의 관점에서 그러할지 몰라도 미학의 관점에서 자작나무숲은 축복이다. 거칫하게 갈라진 하얀 나무 우듬지에서 빛의 입자가 부서지는 풍경은 태양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침묵의 환호성이다. 이 계절의 자작나무는 미처 털어버리지 못한 물든 낙엽을 군데군데 이고 있어 마치 말라붙은 물감을 가루로 빻아 뿌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직설의 색이 표현하지 못하는 가을의 은유. 단풍 든 가을이 느꺼운 트로트의 멜로디라면 함백산의 가을은 바로크 시대 성모애가(Stabat Mater)의 한 악장 같다.

그런데 차의 관성을 죽이지 않고 산을 내려가다 보면 이 숲을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이다. 울긋불긋한 강원도의 가을 풍경에 익숙해진 눈에 백색의 숲은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거무튀튀한 흙색을 배경으로 무의미한 흰색 패턴이 반복되는 벽지가 차창에 스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연이 닿아 가을철 이 길을 지나게 된다면, 반드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지켜볼 일이다. 거기, 깃들어 기도하고픈 숲이 있다.

태백=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빛의 에너지죠" 자작나무에 미쳐 선산에 1만 2000그루 심고 20년간 사진 찍은 원종호씨

"아아, 저 나무가 사람을 미치게 한단 말이야…"

함백산 취재에 동행한 사진작가 원종호(58)씨는 20년 넘게 자작나무만 찍어왔다. 사각형 프레임에 자작나무를 담다 못해, 아예 강원 횡성의 고향 마을 만여 평 선산에 1만 2,000여 그루를 직접 심었다. 그리고 자작나무숲미술관을 열었다. 동이 터오는 순간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자작나무만 바라보고 산다. 그런데도 숲에 들어서자 다시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에너지죠, 빛의 에너지. 자작나무가 사람을 사로잡는 이유는요. 몸체는 가늘고 여리지만 흰 수피가 빛을 반사해내는 느낌은 다른 어떤 나무보다 강렬해요. 처음 보면 가냘프고 애잔한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오래 쳐다보면 나무가 가진 기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자작나무는 남한에서 자생하는 수종이 아니다. 강원도나 경북 내륙의 숲에서 볼 수 있는 나무는 대부분 198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량 산림청에서 정책적으로 심은 것들이다. 그래서 한국의 자작나무는 대개 20~30년생이다. 추운 곳에 자라는 나무이기 때문에 남쪽 지방에선 잘 자라지 못한다. 전국의 자작나무숲을 샅샅이 훑은 원씨는 "가장 울창한 숲이 바로 여기 함백산"이라고 말했다.

자세히 보면 숲 가운데 있는 자작나무보다 길가에 심어 놓은 자작나무의 수피에 검은 부분이 많다. 거뭇한 흔적은 가지치기로 잘라낸 가지의 옹이가 박혀 있던 부분이다. 원씨는 "다른 나무와 달리 자작나무의 수피는 회복력이 없어서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도시에 가까운 곳에 가로수로 심어 놓은 자작나무는 훨씬 어두운 느낌을 준다.

함백산으로 가고 오는 길, 그는 나무보다 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강원도의 굽은 고갯길이 어디라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넓혀지고 펴지느라 공사판이었기 때문이다. 마주치는 차가 거의 없는 호젓한 길에서 피해야 할 것은 산을 파헤친 흙더미와 덤프트럭뿐이었다. 흔적을 지우기 힘든 가지치기로 산맥이 앓고 있었다.

태백=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