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겨온 메리놀 외방전교회(外方傳敎會)가 설립 100주년을 맞아 25일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성당에서 기념 미사를 가졌다. 제2대 청주교구장을 지낸 정진석 추기경이 집전한 기념 미사에는 오스발도 파딜랴 주한 교황대사,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 메리놀 외방전교회 부총장 호세 아람브르 신부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11년 6월 아시아 선교를 위해 창설된 미국 최초의 가톨릭 해외 선교회다. 1922년 교황청 포교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평안도 지방의 포교권을 넘겨받으면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와 함께 한국에서 가톨릭 교회가 기틀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 15명의 소속 선교사가 본당 사목, 병원 원목, 수도회 영성 지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24일 오후 수도원처럼 한적한 서울 광진구 중곡동의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한국 지부장인 함제도(79ㆍ제라르디 하몬드) 신부를 만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으로 1960년 한국으로 건너와 51년째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벽안의 신부는 우리 말이 아주 유창한데다 만면에 넉넉한 웃음을 담은 모습까지, 영락없는 우리네 필부의 모습이다.
뉴욕에 본부를 둔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북한 지역 선교를 통해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함 신부는 “일제 강점기인 88년 전 교황청이 선교사가 부족해서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북한 지역 선교를 맡긴 게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35명의 선교사가 해방 전까지 북한 지역에서 선교ㆍ봉사 활동을 하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에 의해 한국에서 대부분 쫓겨났다. 북한 지역에 남아 암암리에 활동하던 이들도 북한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인 1946년 모두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월남해 충북에 터를 잡은 전교회는 1955년부터 서울과 부산, 수원, 인천, 청주, 마산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00주년 기념 미사를 청주교구 성당에서 연 것도 그 때문이다.
함 신부가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절친이었던 한국인 친구 때문이었다. 고교시절 처음 만나 신학교까지 같이 다닌 그 친구는 바로 4ㆍ19혁명 후 총리에 오른 장면 박사의 아들 장익 주교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함 신부는 27세 때 신부 서품을 받자마자 짐을 싸서 한국에 왔다. 그 후 30년 동안은 줄곧 충북지역에서만 사역했다. 청주대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괴산과 보은, 옥천 등 본당에서는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이제 뼈 속까지 한국인이 다 됐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애도가로 한국 가요 ‘보리밭’을 부르고, 죽어서도 한국을 떠나기 싫어 충북 괴산에 묏자리까지 봐뒀을 정도다.
함 신부는 원래 주 선교 지역이었던 북한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슬프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가 어려운 북한 주민들을 위해 의약품과 의료기기 등을 지원하는 데 앞장 서고 있는 것도 이런 안타까움을 상쇄하기 위해서다. 지난 10여년 동안 50번 넘게 북한을 찾은 그는 올 5월에도 ‘한국 카리타스 인터내셔널’의 대북지원본부장 자격으로 평북 신의주에서 평남 남포까지 40여개 인민병원을 방문해 결핵환자를 돌보고, B형 간염 백신 등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지원했다.
함 신부는 “1960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보릿고개를 견뎌야 할 정도로 경제상황이 어려웠는데 북한의 지금 사정이 그 때의 한국과 비슷하다”고 전했다. 그는 또 경색된 남북관계와 관련, “북한과 한국은 하나의 몸이 절반으로 갈라진 것과 같다”며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해 사랑으로 대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신부다운 해법을 내놓았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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